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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역사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마크 A. 놀 지음, IVP 펴냄)

by 서음인 2016. 6. 2.

요 약 한국의 대다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2000년 기독교를 대표하는 완결되고 표준적이며 보편적인 신앙의 체계라고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권의 대표적 역사학자로 손꼽히는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제) 복음주의란 18-9세기의 미국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 아래서 당대를 지배하던 '상식 철학'이라는 특별한 철학적 사조의 영향 하에 태동했고 역사적 도전에 맞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온 온 특수한 기독교 운동의 한 형태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행동적이고 실용적이며 주로 대중 운동의 영역에서 강점을 보여 왔던 이 운동은 신학이 아닌 일반 현대 학문 분야에서는 '지성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그 특징이며, 따라서 적어도 '지성'의 영역에서는 스캔들이요 재앙이 되고 말았다고 강조합니다. 정밀한 학문적 탐구와 성찰이 필요한 과학이나 정치의 영역에서조차 창조과학같은 유사과학운동이나 세대주의와 같은 어설픈 대중운동의 유혹에 빠진 것이 그 예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1. 노트르담 대학의 교수로 역사학 분야에서 복음주의의 학문적 탁월성을 고양시킨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저자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이란 ‘복음주의 지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1)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적인 체험으로서의 거듭남을 강조하는 회심주의 (2) 궁극적인 권위로서의 성서에 대한 의존을 강조하는 성서주의 (3) 자신들의 믿음을 전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행동주의 (4)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을 강조하는 십자가 중심주의를 그 특성으로 가지는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 사고보다는 행동을 강조하는 대중적이고 실용적인 운동으로, 복음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믿는 수백만의 신자들 돌보는 일이나 당장의 시급한 종교 정치적 이슈에 대해 대중적인 운동을 벌이는 데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현상에 대한 깊이 있고 치밀한 지성적 분석이나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은 태생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 그 결과 북미의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을 제외한) 현대학문과 예술 그리고 다른 고급문화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사고하려는 노력을 거의 포기해 버린 채 자신들만의 게토에 갇혀 있으며, 심지어 정치나 과학과 같이 정밀한 지적 학문적 탐구가 요구되는 분야에서조차 세대주의와 같이 어설픈 종말론적 공상이나 창조과학과 같은 유사과학적 대중운동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지성이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반역을 조장한다는 반지성주의적 편견에 빠져 지성적 탐구와 그 결과를 적대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저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복음주의 공동체가 지성, 자연, 사회, 예술과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피조계의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반지성주의라는 심각한 죄에 빠지는 일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보편화되어 있는 현대 지성계에 대한 효과적 복음전도의 책임을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반지성주의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3. 저자는 16세기의 개혁자들과 17세기의 청교도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원래는 진지한 지성적 운동이었던 복음주의가 오늘날 어떻게 북미에서 ‘지적 재앙’이 되고 말았는지 역사적으로 탐구한다.


(1) 초창기 미국의 기독교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던 부흥운동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비국교화) 의 결과로 얻어진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만들고 교회간의 무한경쟁을 유발했으며, 그 결과 미국의 복음주의는 적어도 18세기부터 조직 확장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대중적이고 정서적이며 실용적인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통'이나 '학문'의 역할이 경시되면서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점차 강화되었다.


(2) 또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① 공화주의적 정치이론 ② 민주주의적 사회이론 ③ 경제적 자유주의 ④ 도덕적 계몽주의라는 미국적 이상을 기독교적 신념과 철저하게 일치시킨 독특한 형태의 기독교를 대중에게 제시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가장 우세한 종교로 부상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미국의 문화적 주류와 기독교 신앙의 이와 같은 성공적 결합은 미국적 이상이 아닌 다른 토대에 근거한 기독교의 가능성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지성의 발전에 큰 해악으로 작용했다.


(3) 이 시기의 복음주의 신앙은 특별히 당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스코틀랜드의 도덕적 계몽주의 (상식철학) 의 전제에 굳게 뿌리박고 있었으며 ① 모든 인간은 공통적인 인식론적 윤리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하나님의 존재나 자연과 도덕의 실체와 타당성 뿐 아니라 심지어 영적인 세계조차도 이러한 능력 - 상식 - 을 통해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② 성경은 과학적 텍스트이자 ‘사실을 모아놓은 저장소’로, 신학자는 과학자가 자연현상을 대하듯 귀납적으로 성경에 접근하여 각각의 부분을 재배치함으로서 모든 이슈에 대한 진리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가정했다. 이와 같은 ‘계몽주의적’ 기독교 신앙은 그 자체가 중대한 지적 결함을 지닌 것이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 활력이 감소되면서 좀 더 세속적으로 변화한 19세기 중엽 이후 미국의 새로운 지적, 종교적, 사회적 환경에 대응하는 데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4) 19 세기말에 닥친 이와 같은 사회 종교적 위기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생존 전략은 근본주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성결운동, 오순절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각각의 운동은 무신론과 세속주의의 물결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기독교 이해에 필수적인 많은 신념들을 보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고고학이나 성서비평과 같은 성서학의 최신 연구성과를 배척하거나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이해의 추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신학적 프로그램에 따라 종말을 예측하는 데 열중하거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성령충만이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오순절주의/성결운동), 지적으로는 모두 재앙이 되고 말았다.


4. 이러한 복음주의적 반지성주의의 폐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분야는 정치학과 과학의 영역이다. ①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성찰은 직관적이고 행동주의적이며, 정치적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학문적 성찰이 결여된 단순한 흑백논리나 음모론 혹은 세대주의적 예언해석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다. ② 극단적인 문자주의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제칠일 안식교의 영향 아래 발생한 창조과학은 최신 과학의 성과를 적절히 수용함으로서 성서 해석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거부하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극단적 대립관계로 몰아감으로서, 결과적으로 19세기의 특정한 맥락에서 나온 성서해석을 옹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라는 책을 희생하는 파괴적 결과를 초래했다.


5. 저자는 이러한 북미의 복음주의가 ‘지성적 운동’으로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매우 희박했지만, 실제로는 1990년대에 복음주의권 내에 지적인 갱신이 일어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지난 몇 십년 동안 북미에서 진행되는 기독교적 사고의 갱신에 전면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복음주의가 가진 지적 자원에서 나온 열매가 아닌 미국의 주류 기독교나 유럽의 기독교, 또는 가톨릭과 같은 다른 기독교 전통에서 제시하는 사상적 틀을 활용한 결과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북미의 복음주의자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독특성 중 많은 것이 기독교의 본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관주의적 성향 대신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로부터 사고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다른 신학 전통으로부터 배워야 하며, 세상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곧 하나님을 찾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계 전반을 탐구하기 위한 진지한 지성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6.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심각한 우리의 문제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죄악시한 채, 학문적으로는 이미 폐기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빈약한 신학이론에 근거해 세상의 모든 현상에서 말세의 징조를 찾아 헤매느라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세대주의자’ 들이나, 어떠한 과학적 증거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유사과학적 지식체계를 ‘과학’ 이라고 강변하며 연구실보다는 대중강연장에서 그들의 ‘진리’를 설파하기에 바쁜  ‘창조과학자’ 들, 특정 시대 특정 철학의 맥락에서 나온 지극히 미국적인 신학 체계를 기독교의 본질 자체이자 영구불변의 진리인 양 간주하며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서슴없이 정죄할 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지옥에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보수/정통 기독교인’ 들이 넘쳐날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일수록 믿음 좋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우리의 현실이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미국의 현실보다 더 암울해 보이는 우리의 상황에서 과연 ‘복음주의 지성’이라는 것이 꽃피는 때가 올 수는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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