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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역사

나는 왜 세계기독교인이 되었는가 (마크 A. 놀 지음, 배덕만 옮김, 복있는 사람 펴냄)

by 서음인 2016. 11. 3.

1.『나는 왜 세계기독교인이 되었는가』『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탁월한 복음주의 역사신학자 마크 놀이 “기독교 역사를 책임 있게 이해하기 위해 비서구 세계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핵심이 되었다고 확신하게 된 과정” 을 자서전 형식으로 쓴 책이다. 이 책에서 마크 놀은 선교에 열심이었던 아이오아의 한 복음적 교회에서 자랐고, 루터 ‧ 칼뱅 ‧ 존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종교개혁의 고전적 거인들에 의해 영적, 지적으로 ‘구조’되었으며, 신복음주의의 영향력이 강했던 휘튼 칼리지를 졸업한 후 성공적이었지만 미국교회사에 한정된 학문적 경력을 쌓아가던 한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역사가가, 여러 스승들과 다양한 사건 그리고 많은 동료들의 영향으로 남반구 기독교를 포함한 세계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심화시키며 “세계기독교인”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2. 저자는 교회사와 선교학의 협력으로 새로이 탄생한 “세계기독교”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기독교는 더 이상 서구 백인들만의 종교가 아니며 세계기독교의 중심이 급격히 남반구(비서구 사회)로 이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역동적으로 부흥하는 기독교 공동체는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와 같은 비서구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모든 교회적 ‧ 신학적 ‧ 도덕적 범주는 역사적이고 상황적이지만 동시에 참다운 기독교 진리에 온전히 참여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역사는 모든 시대의 족속과 민족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기독교”의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욱 “세계기독교”이며, 전통적인 서구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기독교의 유일한 ‘규범적’ 혹은‘ 표준적’인 모델로 간주될 수 없다.

 

3. 이 책은 “세계기독교”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미국 저자에 의해 씌어지고 북미 복음주의권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지극히 ‘미국적인’ 책이다. 그러나 미국(교회)을 정신적 고향으로 삼고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멘탈리티로 무장한 근본주의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넘쳐나는 한국에서도 이 책은 상당한 적실성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서구 중심적 기독교 패러다임 안에서 만족하며 자신이 자라온 기독교 전통이야말로 시공간을 초월한 기독교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던 저자가, 자신의 기독교가 사실은 미국이라는 ‘일개 지역’ 내의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산물임을 깨닫고,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세계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이야말로 바로 오늘 ‘백인의 마음을 가진’ 한국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꼭 필요한 과제라고 믿기 때문이다.

 

4. 마지막으로 하나 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여정은 실제로는 흔히 '교리'와 동의어인 ‘진리’라 불리는 정교한 지도의 인도에 따라 흔들림 없이 천성을 향해 전진하는 군병의 길과, 꼭 필요한 정보만이 담긴 간략한 지도와 나침반에 의지하여 미지의 대해를 향해 용감하게 닺을 올리는 모험가의 길 중 어떤 쪽에 가까울까? 혹시 마크 놀이라면 후자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나 역시 그렇다.

 

본문 엿보기

 

불일치 일단 선교사들과 원주민 동역자들이 성경을 번역하면, 성경은 더 이상 선교사에게 속하지 않고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번역 선교사들은 새로운 회심자들이 대속적인 구원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에 집중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회심자들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 사이의 대결이나 마태복음의 족보를 전체 성경 이야기의 열쇠로 간주할 수도 있다. 나의 새로운 독서 경험이 보여주었듯이, 번역 과정은 선교사들이 묘사하는 ‘복음 전달’이라는 단순한 과업이 결코 아니었다 ...... 다섯 명의 젋은 선교사들이 에콰도르 정글에서 와오라니 아우카 원주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진 1956년 1월, 미국의 모든 복음주의 신자들과 함께 우리 교회 청년들도 갚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나는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을 위해 고난과 박탈, 심지어 죽음마저 경험했던 수천 명의 다수 세계(비서구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지한 관심을 보였거나 그것에 준한 어떤 책도 기억나지 않는다 ......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어린 시절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해 기억하는 것과 후에 세계기독교의 동력에 대해 배운 것 사이에는 심각한 불연속이 존재했다. (1장 시더래피즈 中)

 

세계기독교 1 청년기 동안 나는 근대 초기 유럽 개신교로부터의 통찰을 흡수함으로써 당대 미국 복음주의의 내부에서 양산된 딜레마의 해법을 발견했다. 이런 변화는 세상 전반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당시에는 내 경험의 어떤 것도 더 광범위한 기독교 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 내가 마르틴 루터에 주목하던 동안 더 넓은 영역(비서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던 진실로 중요한 발전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 나는 경험을 통해서 세계기독교와 연결되었다. 그것은 비교문화적 접촉의 결과로 생긴 하나의 발견이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복음을 바라봄으로써, 나는 제대로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을 주목함으로써 나 자신과 환경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영적 확신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알게 된 것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2장 종교개혁으로 구조되다 中)

 

세계기독교 2 세계기독교 의식의 근본 원칙은 모든 교회적, 신학적, 도덕적 범주는 상황적이지만(즉, 모든 것은 특정한 시간, 장소, 환경에서 토착화의 역사를 가진다), 동시에 참다운 기독교 진리에 온전히 참여한다는 것이다 ..... 기독교적 삶은 하나님 은총의 역사적 안정성 안에 근거하며, 교회의 사상은 문화를 포용하는 성육신의 특성에서 형태를 갖춘다 ..... 내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로서의 일반 소명과 학문 안에서 특별한 부르심을 결합하기 위해 ‘진정한’ 기독교적 신앙의 범주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이런 범주들이 내가 거의 상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광범위할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 만일 내가 특정 문화의 표현을 통해 보편적인 복음을 경험하고 있다면, 같은 복음이 다른 문화적 표현들을 통해 강력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표현들이 내게 낯설거나 이국적일지라도 말이다. (3장 나의 스승들, 5장 첫 번째 외출 中)

 

교리 니케아 신경의 핵심 조항들이 근본적인 실재를 완벽하게 묘사했다는 확신이 심화되면서, 내가 기독교 교리에 대해 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방식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 교리가 실제로 더 중요해졌지만 - 가장 중요해 보였던 교리적 질문들의 범위가 상당히 축소되었다 ...... 나는 이런저런 교리적 질문들에 대해 다양한 신학 전통들이 제시한 대안과 답변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학자의 본능으로, 어떻게 다양한 전통 중에서 특정한 전통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질문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시했는지에 대해 아는 것도 비슷하게 중요해지고 있었다. 나는 “예수가 대답이다”라고 충분히 확신했다. 하지만 점차 이 결정적인 대답을 촉진하는 질문들이 넓은 가능성의 범주에 따라 다양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6장 북쪽 바라보기 : 하나의 지침 中)

 

비교문화적 적응 1 ‘세계기독교’는 기독교 자체의 핵심특성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비교문화적 적응은 기독교가 번성하는 모든 곳에서 핵심이었다. 기독교 자체가 비교문화적 소통이라는 신적 선물을 통해 시작했으며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의 단어장에 기입된 일종의 외래어가 아니다. 그는 온전히 번역되고, 언어의 기능 체계 속으로, 인격, 경험, 사회관계의 가장 온전한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번역이라는 원초적 행위를 따른다는 것은 회심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가 전달되는 다른 사회의 사유 형태와 문화 속으로 끝없이 재번역되는 것이다.”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세상 속으로 번역되신다는 이해는 기독교 역사가 지속적으로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새로운 깊이와 이해를 펼쳐 준다는 의미다. 월스의 말을 한번 더 인용하면, “그리스도가 다양한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다양한 사유형태와 생활 체계로 더 많이 번역될수록, 우리 모두는 공통적인 기독교적 정체성 안에서 더 풍요롭게 될 것이다.” 그의 통찰은 오늘날 세계 전체로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는 모습에 놀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위대한 선물이 되었다. (9장 세 번째 외출 中)

 

복음주의 일반적으로 서구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특별히 내가 속한 전통의 복음주의자들은 마치 자신은 서구의 문화적 발전으로부터(혹은 미국 근본주의/복음주의의 특이한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듯이 우리의 신앙 표현을 어느 정도 규범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내 자신의 기독교를 단순하게 규범적인 기독교로 취급하는 본능에 저항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품었던 기독교가 일개 지역의 문화적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최소한 개념적으로나마 내 자신의 것과 매우 다른 형태의 기독교 발전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17장 글을 쓰며 행한 연구 中 )

 

가톨릭 가톨릭 대학인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최근 세계 기독교 역사의 가톨릭적 차원을 탐구하려는 노력은 내가 개신교적 현상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던 것을 멋지게 보충할 뿐 아니라, 많은 학생 및 교수들과의 만남은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자 기독교 신앙의 한 형식으로서의 가톨릭교회가 실절적으로 세계기독교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나는 가톨릭교회가 보전하고 있는 고전적인 기독교 교리 (삼위일체, 그리스도, 성령, 죄, 창조된 세계의 본질, 기독교 윤리)을 더 많이 존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종교개혁 전통에 대한 나의 헌신도 더 강해졌다. 특히 죄, 은혜, 구원에 대한 설명,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성경 메시지의 명료함, 개신교적 가르침에 깊숙이 뿌리를 둔 평신도 참여의 요청이 그랬다. (18장 노트르담 中)

 

비교문화적 적응 2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설’같은 전통적인 루터파 공식이 21세기 아프리카에서 16세기 독일에서만큼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계속되는 이야기는 일정한 범위의 가능성을 증언한다. 즉, 이런 고전 공식을 반복하고 그것들이 처음 발언될 때 발생했던 동일하게 개인적인 변화들을 찾아보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에 주목하는 대신, 일차적으로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빈곤, 억압, 무지)에 적용하도록 그 공식을 다시 서술하라. 혹은 루터교도들이 전통적으로 이신칭의 안에서 발견해 온 개인적인 구원을 그 지역에서 강력한 사명으로 남아 있는 사회적 불의로부터의 구출과 결합시키도록 노력하라 .....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기독교 전통의 풍요로움을 내재화하며 일상생활에 반응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존경하는 신학이 분명히 출현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인식하는 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말이다. (19장 지금까지의 이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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