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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역사

유신을 말한다 (배성인, 이만열 외 지음, 나름북스 펴냄)

by 서음인 2016. 6. 2.

1.유신체제는 얼추 내 초등학교 시절과 겹친다. 내게 그 시절은 “우리는 민족중흥의...”로 시작되던 국민교육헌장 달달 외우기와 어느 날 하교길에 목격했던 고려대학교 정문 앞의 탱크와 군인들(아마 75년 위수령때가 아니었을까?) 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후 아마도 중학교 때였던가 술자리에서 엽색행각을 벌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심복의 총탄에 사망하면서 이 체제는 공식적으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책에서 반공주의, 군사주의, 토건주의, 성장주의 같은 유신체제의 유산들이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아직 유신체제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박정희의 딸로 유신체제하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만약 우리가 유신체제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해 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역사의 퇴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2. 이만열 교수에 의하면 유신체제는 ‘악랄한 파쇼체제요, 우리 민족사에 등장한 전대미문의 국가폭력체제’이자, ‘분단상황을 상대방에 대한 긴장수위를 높이는 지렛대로 삼아 더욱 비민주적 반통일적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갈 수 밖에 없었던 적대적 공생체제’였다. 그리고 법학자인 오동석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유신체제를 지탱했던 유신헌법은 소위 “헌법적 불법”의 대표적 예이며, 법률적으로 보자면 유신체제는 입헌민주주의적 민주공화국체제가 아닌 전체주의적 국가형태로서 ‘보나파르티즘 국가’에 불과했다. 또한 이만열 교수는 유신체제가 산업화를 이룩했다는 신화에 대해서 오히려 4.19로 인한 민주화의 열기가 군사정권하에서도 계속 분출되면서 산업화를 견인한 것이며, 그렇게 무자비하고 강압적인 국가폭력을 동원하고서도 그 정도의 산업화밖에 이루지 못했다면 그것은 정권의 무능함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유신체제를 경험했던 세대는 그 괴물에 맞서 싸운 이들을 향해 부채의식과 함께 공범의식과 통렬한 자괴감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것만이 유신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3. 교사에서 대일본제국 장교로, 다시 해방된 한국군의 장교이자 군의 남로당 책임자로, 사형선고와 사면 후 쿠데타를 일으킨 ‘불행한 군인’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손오공을 무색하게 만드는 변신의 귀재인 이 ‘문제적 인물’을 왜 사람들은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 중 한명인 한길석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구조가 유발한 빈곤에 대한 공포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내면화한 개발 및 성장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지도자가 모든 필요를 마술적으로 채워주기를 기대하는 ‘황금가지식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무덤속에 잠들어 있어야 할 그의 망령을 다시 불러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숲의 왕’은 사람들의 왜곡된 기억과 헛된 욕망이 만들어 낸 허깨비일 뿐. 이 유신의 망령을 다시 무덤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바) ‘정치적 삶의 길’, 혹은 ‘생활 문화로서의 민주주의’일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4. 박정희의 쿠데타군은 왜 그 당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해 이승원 교수는 그 당시 군부가 가장 근대화되고 잘 조직된 집단이자 대중들에게 비교적 부패와 거리가 먼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한미동맹과 조국통일, 반공주의, 경제성장과 같은 그들의 혁명공약이 대중의 의식과 욕망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공약은 오늘날도 여전히 한국의 보수 담론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계기로 작동하고 있으며, 박정희 신드롬 역시 박정희 개인의 자질이나 퍼스낼리티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고 쿠데타가 신화화되며 6개 공약이 하나의 거대한 정치 담론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채운 시절에 대한 향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5. 김창근 교수에 의하면 경공업 위주의 수출전략이 난관에 봉착하고 부실기업 문제가 발목을 잡자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유신선포라 불리는 8.3 조치로 대변되는 중화학공업화 전략과 극단적 노동, 임금탄압을 통해 난관타개를 시도했다. 그 결과 거시적 측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과잉투자와 무역수지 적자폭의 확대 그리고 국민들의 저항에 봉착하게 되며 이는 또 다른 경제위기와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는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이 박정희의 경제 전략의 직접적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수호의 첨병으로서 한국이 가지는 냉전하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와 그에 따른 미국의 지원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6. 김영미 교수는 새마을 운동이 성공한 정부의 관제 농민동원운동이었지만 정부의 조직 이전에 이미 농촌사회에 존재하던 농민의 자생적 지역개별의 성공사례들이 존재했고 농민들 역시 그들의 발전을 위해 국가권력에 대해 협력과 저항이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했기에, ‘무기력한 농민’과 ‘전능한 정부’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준식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가 인가한 관광업소에서 정부기관의 체계적 감독 아래 조직적인 매매춘관광을 벌인 나라는 유신체제의 대한민국밖에 없으며, 이는 일본군 장교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박정희 정권의 지배 엘리트들이 만주에서 체험했을 위안부의 존재를 통해 성이 국가에 의해 동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 결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7. 유신체제는 대중의 본질적인 욕망인 자유로움을 이데올로기를 통해 박탈하고 다양한 장치로 일상생활을 통제하던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체제였다고 배성인 교수는 말한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안보 및 반공주의, 발전 담론, 근대화담론 등이 대중을 제체 순응적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된 주요 이데올로기들이었으며 법, 교육, 언론 등을 통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이데올로기적 조작과 일상의 전면적 통제가 이루어졌다, 국민의례, 교련교육, 주민등록제, 국가보안법, 국민교육현장과 같이 국가주의에 동원된 국민을 재생산하는 효율적인 장치를 통해 대중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지 스스로 체득하여 자발적인 복종을 지속했으며 21세기에 들어와도 무의식적인 습속이 되어 동일한 행태를 연출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8. 서슬이 퍼렇던 유신치하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해 가르치시던 한 선생님의 입에서 나왔던 한 마디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된장은 된장일 뿐 치즈가 아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희미해져버린 것 같은 오늘 이 시대에 새삼 그 선생님이 누구셨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한 가지. 나는 아직도 여자는 커녕 술담배 소리만 들어도 벌벌떠는 자칭 보수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딸 뻘인 젋은 여성들을 끼고 술판을 벌이다 심복의 총탄에 사망한 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박정희는 그들이 좋아하는 개인윤리의 차원에 국한해 보더라도 술먹으며 계집질하다 총맞아 죽은 최악의 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그 악행을 단번에 사해 줄 예수의 이름도 믿지 않고 죽었으니 지금쯤 지옥의 불구덩이에서도 사탄 바로 옆의 가장 뜨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혹시 그들이 혹시 숨겨진 사탄 숭배자란 말인가? 아니면 박정희가 "경건한"그들의 마음속 한켠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 권력과 섹스의 욕망을 극적으로 대리만족시켜 주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 악인을 그다지도 '물고 빠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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