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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회/종교인류신화

슬픈 열대 (레비 스트로스 지음, 한길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27.

1.『슬픈 열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류학자이자 현대 구조주의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가 1937년에서 38년까지 브라질의 오지에 살고 있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 등 네 부족을 탐사한 기록을 담고 있는 인류학 보고서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인류학의 영역을 넘어서 이 대학자의 사상적 편력을 담은 지적 자서전이자, 20세기의 후반기를 풍미했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를 엿볼 수 있는 인문학의 고전이기도 하다. 참고로 색인까지 포함하면 총 76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두툼한 책은 현재까지 한길 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2. 레비 스트로스는 이 책에서 그가 관찰한 원주민들의 사회는 혼돈을 피하고 질서를 파악하는 나름대로의 훌륭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 우리보다 미개하거나 열등한 사회가 아니라고 강조함으로서, 서구인들의 사유를 지배해 온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또한 저자는 그가 만나기를 원했던 ‘순수한’ 원주민 사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선교사나 제국주의자 현지 정부 등에 의해 이루어진 ‘선진적’인 현대문명의 침투로 인해 이들 사회의 전통이 파괴되고 원주민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보고 분노하며 슬퍼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원주민 사회는 바로 “슬픈 열대” 였다.


3. 이렇듯 문명-야만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다양한 문명과 사회의 기저에는 동일하고 보편적인 무의식적 사고구조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레비 스트로스의 이론은 흔히 역사의 진보를 거부한 채 기존의 질서와 기득권을 옹호하는 보수적 사고에 불과하다고 비판받는다.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 - 진보, 자본, 혁명, 반공, (종교적)도그마 등등의 이름을 가진 - 라는 프로쿠루테스의 침대에 나와 다른 모든 타자를 꽁꽁 묶고 피를 보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기준을 강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자들에게는 ‘틀림이 아닌 다름’을 말하는 레비-스트로스야말로 가장 급진적이고 위험한 인물이 아닐까?  


4.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은 전부 빨갛게 보이는 심각한 장애를 가진 극단적 수구세력에서부터 IS 를 방불케 하는 종교적 율법국가를 이 땅에 세우기 원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극단적 근본주의가 버젓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우리 사회는 아직 이 인류학자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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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여행을 통한 도피라는 것도 우리 존재의 역사상 가장 불행한 부분과 우리를 대면하게 만들기밖에 더 하겠는가? 이 거대한 서구문명이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기적을 낳기는 했으나 부작용이 안 생기도록 막는 데에는 분명히 성공하지 못했다 .... 서구의 질서와 조화는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는 막대한 양의 해로운 부산물의 제거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여행이여, 이제 그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인류의 면전에 내던져진 우리 자신의 오물이다 .....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행담에 대한 사람들의 정열, 광기, 그리고 기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담이란, 지금은 없어져 존재하지는 않지만 마땅히 계속 존재해주기를 우리가 바라는 그런 것의 환영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니까. (제1부 여행의 마감 4.힘의 탐구 中)


실재가 체험을 포괄하며 설명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었으나 나는 나의 세 스승인 이들 지질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실재와 체험 간의 통로는 불연속적인 것이며,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감상적인 것을 벗어난 객관적인 총합 속에서 후에 되찾을 각오를 하고, 우선 체험을 거부해야만 한다고 배웠다. 실존주의 속에서 꽃피려 하던 사상의 동향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주관성의 환영에 대해 나타내는 호의적인 태도 때문에 내게는 정당한 사고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였다. (제2부 여로 6.나는 어떻게 민속학자가 되었는가 中)


일찍이 사람들의 시선이 전혀 닿은 적이 없는 여러 지역을 탐색하면서 수천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해주는 대가라고 생각해야 할 궁핍 속에서 원주민과 함께 생활할 때에도 나는 거기서 내가 찾고 있는 민족이나 풍경은 볼 수 없었다. 내가 대신 본 것은 내가 자청해서 떠나버린 프랑스의 아른아른한 시골풍경이나, 아니면 인생에 대해서 부여하고 있던 의미를 부정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내가 포기했던 한 문명의 가장 전통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과 시의 단편이었다 ..... 그러고 보니 여행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의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로구나. (제9부 귀로 37.신이 된 아우구스투스 中)


고고학과 인류학의 조사를 통해서 어떤 문명들은 우리들이 아직까지 고심하고 있는 문제들을 가장 훌륭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 우리는 각 사회가 인간사회에 열려있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으되, 그와 같은 선택은 상호간에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 완전한 사회란 없다. 각 사회는 그들이 주장하는 규범들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불순물을 그 자체 내에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 불순물은 구체적으로는 잔인, 부정, 그리고 무감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같은 요소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민족학적 조사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제공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어떤 적은 수의 사회를 비교하면 서로서로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게 되지만, 조사의 영역이 확대되어 나감에 따라서 이 차이점들은 점점 감소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어떤 인간사회도 철저하게 선하지는 않다는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사회나 근본적으로 악한 것도 아니다. (제9부 귀로 38.럼주 한 잔 中)


우리가 식인종을 비난하는 이유인 죽음의 신성함에 대한 무시의 정도는, 우리가 해부학 실습을 용인하고 있는 사실보다 더 크지도 더 작지도 않다 ..... 우리는 만약 어떤 다른 사회의 관찰자가 조사하게 된다면, 우리들 자신의 어떤 관계들이 그에게는 우리가 비문명적이라고 간주하는 식인풍습과 유사한 종류로 간주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 우리와 상이한 관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간주하듯이 우리들 자신도 그들에게는 야만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 다만 우리가 동료 인간들을 잡아먹는 대신에 그들을 신체적, 도덕적으로 단죄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의 ‘위대한 정신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믿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9부 귀로 38.럼주 한 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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