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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회/종교인류신화

우상의 황혼과 그리스도 - 르네 지라르와 현대사상 (정일권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르네 지라르 (김모세 지음, 살림 펴냄)

by 서음인 2016. 5. 28.

1. 고려신학대학원과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을 거쳐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 )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이 현대 사상과 관련하여 르네 지라르의 문명이론을 소개하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디오니소스 對 십자가에 달리신 자”의 대립을 통해 이천 년 유대-기독교 사상의 전복을 기도했던 니체와 그 후계자들의 백 년에 걸친 철학적 유산을, 지라르 사상을 통해 다시 한 번 뒤집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먼저 지라르를 통해 니체와 그 후예인 포스트모던 사상을 뒤집고, 이 뒤집기를 통해 다시 ‘십자가에 달린 자’ 혹은 이천 년 전통을 가진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의 복권을 시도한다. 그리고 지라르 문명이론의 빛 아래서 파스칼, 니체, 하이데거, 하버마스, 바티모, 시몬 베유, C.S. 루이스, 에리히 프롬, 칼 융, 엘빈 플린팅가, 칼 바르트, 위르겐 몰트만, 마샬 맥루한, 현대 물리학, 불교, 유교에 이르기까지 신학과 인문학, 과학과 종교의 영역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다양한 사상과의 대화와 대결을 시도한다. 

 

2. 지라르는 인간이란 “욕망하는 존재”이며, 욕망으로 인한 질투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라르에 의하면 특정한 주체(subject)의 욕망이란 언제나 스스로에게서 우러난 욕망이 아닌 이웃이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이자(모방욕망), 욕망의 대상 자체가 아닌 그 대상을 소유한 이웃(중계자 model)에 대한 욕망이다. 그리고 만약 주체와 중계자의 거리가 심리적 물리적으로 극복 가능할 정도로 가깝다면(내적 중계 internal mediation), 중개자는 모델인 동시에 장애물(model-obstacle) 이 되어 주체와 중개자 사이에는 질투심으로 인한 갈등과 경쟁이 발생하게 되며, 이러한 경쟁은 결국 모든 구성원 사이의 차이를 소멸시키고(부정적 무차별화) 집단 전체를 갈등과 폭력에 빠뜨려 집단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 이러한 모방욕망으로 인한 무질서와 폭력이라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유사 이래 인류의 모든 문명과 사회는 무질서의 원인으로 비난받는 동시에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우상으로 여겨지는 희생양에 대한 초석적 살해를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서 내부적 폭력을 통제하며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지라르는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야말로 모든 인류 문화의 공통된 기원이며, 모든 신화는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 폭력과 살해의 기억을 은폐하고 있는 “박해의 텍스트”라고 강조한다. 저자에 의하면 흔히 평화의 종교로 알려져 있는 불교 역시 실제로는 희생제의에 근거한 폭력적 종교이며, 붓다들은 은폐된 희생양이다.

 

3. 그러나 희생양 메커니즘의 밖에서 거룩한 타자로 오셔서 마지막 희생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수난은 이러한 인류 문화의 희생제의적 기원을 단 한번에 그리고 영원히 폭로했으며, 모든 성스러움과 신화가 감추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초석적 살해) 을 드러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자’ 에 의해 달성된 모든 종교의 탈신성화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모든 이교적 질서에 대한 결정적 정죄이자 우상의 황혼을 의미했으며, 그 질서에 참여하는 군중의 은폐된 폭력을 고발함으로서 나그네와 약자, 타자들인 희생양들을 변호하고 구원했다. 오늘날 폭력에 대한 서구의 독특한 민감성이나 ‘희생양들에 대한 근심’ 그리고 자유와 평등,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를 통해 전통적인 희생제의적 질서를 전복하고 폭발시킨 묵시록적 진리인 기독교의 영향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어린양에 대한 예배는 기존 현실에 대한 묵시록적 비판이자 정의롭지 못하고 억압적인 인류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행위가 된다. 기독교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자의 고난과 무죄한 희생양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위험한 기억(memoria passionis) 이다.

 

4. 니체는 그의 책 <우상의 황혼>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자로 말마암아 우상들의 황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하늘이 텅 비게 되었다고 옳게 지적했지만, 그리스도가 디오니소스의 자리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다시 한번 디오니소스를 귀환시켜 텅 빈 하늘을 채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희생제물인 동시에 성스러운 폭력의 선동자와 집행자이기도 한 디오니소스의 귀환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비이성적 비도덕적 철학으로 되돌아가려는 퇴행이자, 보다 성숙한 자세로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한 채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유아기적 혼돈(chaos) 으로 다시 회귀하려는 위험한 시도였으며, 그 결과는 건강한 유럽 문화의 갱신이 아닌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파시즘 체제로 귀결되고 말았다.

 

5. 유대-기독교 전통에 의해 ‘탈신성화된’ 사회는 이제 폭력적이지만 효율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보호장치 없이 스스로 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실제로 유대-기독교 전통의 계보학에서 탄생한 현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니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스스로 붕괴될 위험을 품고 있는 “상처받기 쉬운 절대”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은 도덕적이고 성숙한 어른으로 자신들의 폭력에 대해 책임 있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으며, 모방 욕망의 위험성을 인식하지만 그것을 거세하기보다는 “올바른 거리”를 유지하거나 긍정적으로 승화시킴으로서 그 뜨거운 복잡성을 견딜만한 도덕적 인격적 근육을 가지고 있다. 이웃에 대한 모방 욕망으로 일그러진 ‘군중(mob)’ 이 아닌,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성숙한 ‘개인’이 이 상처받기 쉬운 질서를 지탱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공동의 적/희생양이 없는 새로운 폴리스로서의 에클레시야로 부름받았으며, 인류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이 거룩한 일치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교회는 세계질서에 기생하는 창녀가 아닌 어린 양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

 

6. 이 책은 르네 지라르의 문명이론으로 전통종교와 현대사상이라는 대해를 횡단하려는 야심찬 시도이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님의 진리로 수렴한다는 (All truth is God's truth) 사실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복음적 기독교 신앙의 전통에 굳게 서 있지만 특정한 교파적 신앙의 전통과 언어에 갇히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현대사상 및 신학 전통들과 대화할 뿐 아니라, 학문적 엄밀함과 신앙적 열정, 인류학적 시각과 신학적 관점을 잘 통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펼쳐가고 있다. 사족으로 이 탁월하고 매력적인 책에 두 가지의 질문을 덧붙이고 싶다. (1) 지금까지 현실 속에 존재했던 ‘역사적 기독교’는 과연 과거부터 존재했던 희생양 메커니즘이나 그로 인한 폭력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가? 이 책이 펼치는 타종교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 좀 더 공정하고 설득력있게 들리려면 먼저 훨씬 날카로운 비판의 칼끝을 역사적인 기독교를 향해 겨누어야 하지 않을까? (2) 과연 니체 100 년의 유산인 포스트모던 사상은 기독교와 어떤 접점도 가질 수 없는 “파리로부터 온 사탄”일 뿐인가?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에게서,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정일권 박사가 르네 지라르에게서 기독교의 새 면모를 보여 줄 지혜를 빌려 왔다면, 우리가 니체와 포스트모니즘 사상에서 갱신된 기독교를 담을 “새 부대”를 빌릴 수는 없는 것일까?


# 참고로, 지라르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입문서로는 살림출판사에서 나온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 중 한 권인 <르네 지라르 - 욕망, 폭력, 구원의 인류학>을 첫손에 꼽을만 하다. 지라르의 사상을 모방욕망 - 희생양 - 기독교라는 발전의 단계별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문화의 기원과 기독교라는 스캔들

2장 디오니소스 대(對) 십자가에 달리신 자

3장 니체의 황혼과 지라르

4장 유교와 불교 문명 간의 대화와 문명 담론

5장 우상의 황혼과 자연과학의 탄생

6장 기독교 미학: 어린 양과 거대한 짐승의 우상

7장 사회적 짐승의 우상과 군중의 병리학

8장 미학적 전환과 윤리적 전화

9장 기독교적 성숙성: 신비와 저항

 

본문 엿보기 (르네 지라르와.... )

 

레비나스  레비나스에 의하면 개인은 타자성에 직면할 때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다. 각 개인 또는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가 없다면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런 레비나스의 사상은 문화 일반의 희생제의적 성격을 분석하는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지라르도 객과 고아와 과부 같은 약자와 타자를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레비나스처럼 성경적 정신에 기초한 윤리적인 선택을 시도한다......그러나 지라르가 보기에 레비나스는 폭력의 뿌리에 존재하는 경쟁의 모방적 성격을 보지 못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을 탈출하는 과정이 성스러움에서 거룩함으로, 상호성으로부터 관계성으로 옮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영웅주의에서 성자다움으로의 변화와 비교할 수 있다. 지라르는 헤겔의 오류와 프로메테우스적 희망을 넘어서 묵시론적 합리성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자의 모습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인류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고,  옛 영웅의 모델을 대체하게 되었다.

 

유교와 제사  카스트 제도와 유교적 질서 등은 모두 불 제사와 조상 제사와 같은 희생제사에 대한 논의 없이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제사상의 돼지머리는 동물제사의 흔적이다. 그것은 다 오래전에는 사람 머리였을 것이다. 돼지머리를 사람머리로 볼 줄 알아야 참된 계몽이다. 지라르가 말했듯이, 죄 없는 희생양들을 머리를 가운데 두고 이루어지는 화해는 마지막 희생양인 십자가에 달리신 자로 인해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돼지머리가 놓인 제사상은 과거 질서의 반복이지만, 성만찬의 식탁은 앞으로 다가올 종말을 미리 앞당겨 선포한다.

 

몰트만  철학자 니체가 등을 돌려버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얼굴 속에서, 기독교 신학자는 몰트만의 책의 제목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십자가는 수평적으로 보면 폭력적인 마지막 희생양 사건이지만, 수직적으로 보면 태초부터 감추어진 것들, 즉 문화의 기원인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종결시키고 치유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자신의 아픈 사건이다. 지라르를 알게 된 다음부터 나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사건을 인류의 일반적 문화의 기원과 연결해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몰트만이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세계의 희망에 되게 했다는 사실은 교회가 강자의 번영과 성공욕과 야합할 것이 아니라, 억눌린 자의 자의 고난에 동참하여 희망을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C.S. 루이스  루이스에 의하면 이방 종교의 신화는 거짓된 것이 아니고 미완성의 것이다. 기독교는 완성된 신화다. 하지만 지라르의 신화 해독에 의하면 이교적 신화는 희생양을 만드는 폭력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거짓되고 왜곡된 박해의 문서다. 루이스가 이교적 신화를 복음에 대한 준비, 일반은총적 진리의 조각등의 개념과 유사한 방향으로 이해했다면, 지라르는 질서와 평화를 위해 한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는 공동체의 폭력을 고발한다. 루이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역사적 사실에 동의하는 동시에, 모든 신화와 조화되는 듯한 상상적인 포용력으로 신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에 지라르는 인류학적 관점으로 죽임 당하고 신성화되는 희생양들의 이야기 속에 초석적 살해라는 폭력적 진실이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인류 문화의 기원과 신화에 대한 이런 낭만적 이해를 거부한다....나는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모던 철학이 새롭게 발견하려는 스토리와 은유, 상징과 신화가 기독교적 의미로 세례를 받은 이후에 새롭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칼 바르트와 모차르트   바르트는 예수가 바흐의 곡에서는 결코 승리자로서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불만족을 말했다. 이에 비해 모차르트는 바르트에게 가장 영적이고 가장 심오한 음악가다. 바르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하늘 나라의 비유“라고 불렀다.......기독교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 앞에서의 폭력성과 죄성에 대한 깨달음도 있지만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새로운 것으로 해방시키는 십자가의 승리와 어린 양의 승리의 노래도 있다. 어린 양의 노래는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밝고 명랑하고 초월적이며 승리를 노래한다. 우리가 오만한 기독교의 승리주의를 비판하고 거부한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승리와 어린 양의 승리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 자라르의 이론을 잘 알고 있는 영국 신학자 밀뱅크의 지적처럼 서구 현대 신학은 그 정서에 깊이 뿌리박힌 현대 세계에 대한 열등의식과 "질못된 겸손" 때문에 너무 쉽게 이교적인 요소를 "관용"하고 너무 가혹하게 자기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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