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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예술/기타

예술, 정치를 만나다 (박홍규 지음, 이다미디어 펴냄)

by 서음인 2016. 5. 30.

1.법학자요 아나키스트로서 많은 저술들을 통해 꾸준히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왔던 저자는 이 책에서 정치와 관계가 깊었던 세계적 예술가 8명을 중심으로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예술과 정치를 잘 조화시켜 양쪽 모두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유형인 루벤스와 괴테, 오페라라는 19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을 통해 당대의 정치 현실에 적극 대응했지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갔던 베르디와 바그너,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평화의 예술을 지향함으로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한 예술가들인 피카소와 채플린, 권력의 간섭을 철저히 거부하고 억압에 대항함으로서 국가나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인류애적 이상을 추구했던 사르트르와 레논이 그들이다.

 

2. 진정한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던 루벤스나 괴테는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정치에 적극 참여했으면서도 권력에 종속되기보다는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이 가졌던 권력과 부를 정당하게 사용했던 드문 예에 속한다. 그들은 자유와 평화라는 세계주의적 보편주의적 이상을 예술과 정치 모두에서 추구했고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러나 저자는 파우스트의 말인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차지하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로 대표되는 근대 부르주아의 이상이 결과적으로 근대 서구열강의 팽창과 식민지화라는 야만으로 이어졌음을 지적하고 있다.

 

3. 19세기의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인 베르디와 바그너는 음악이 일부 특권층의 오락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했다. 그러나 베르디가 그의 음악을 통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고전적 민족주의자요 자유주의자이자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에 헌신한 애국자이며 공화주의자였다면, 평생 권력과 물질에 집착했던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를 통해 강력한 국가주의적 전체주의적 정치성향과 심지어는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적 생각을 드러냈다. 처음에 바그너와 교류했던 니체는 이러한 정치적 속물주의와 인종주의에 질려 바그너와 멀어졌으며 그의 책 “바그너의 경우”에서 후세가 바그너의 주제에 포함된 애국주의와 인종주의에 빠져 전쟁의 참화로 돌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이는 바그너를 숭배했던 히틀러를 통해 비극적으로 실현되었다.

 

4. 자유로운 사랑과 전위적인 예술이 옹호된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부르주아의 자연주의와 대립하는 전위적 예술과 권력에 저항하여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반전 평화주의적 작품들(게르니카) 을 통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자유를 추구했던 피카소, 그리고 타고난 아나키스트이자 천성적 보헤미안으로서 평화와 자유, 평등에 대한 신념에 투철했던 위대한 영화인 찰리 채플린은 공히 히틀러나 프랑코와 같은 부당한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평화의 예술을 지향함으로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시대정신에 투철한 반항적 예술정신의 댓가로 피카소는 독재자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으며, 채플린은 메카시즘의 광기가 미국의 휩쓸 때 그의 조국에서 추방되어 이국 땅 스위스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5. 개인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실존이 국가나 이념과 같은 전체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그의 실존주의 철학에 따라 평생 어떠한 국가나 사회제도에도 구속되기를 거부하고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적 이념을 비판하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았던 사르트르와, 정치를 예술의 소재로 삼아 그의 평화주의적 신념에 따라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노래했던 존 레논은 권력과 거리를 유지한 채 그 간섭을 철저히 거부하고 예술을 통해 억압에 대항함으로서 국가나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인류애적 이상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적 사고를 가진 당대의 주류로부터 냉대와 소외라는 대가를 (레논의 경우에는 생명까지도?) 치뤄야 했다.

 

6. 저자는 근대 예술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근대 국가의 성립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문제일 뿐 정치와 무관한 예술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상 존재했던 예술과 권력의 관계는 대부분 예술이 정치에 종속된 왜곡된 불륜관계였으며, 이것은 가끔은 바그너와 같이 위대한 예술가나 고전으로 대접받는 예술작품에서도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는 참된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어떠한 형태의 전체주의나 권위주의와도 공모해서는 안되며, 정치권력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당당히 비판하고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예술과 정치는 모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와 복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7. 그러나 문제는 서경식 교수가 그의 책 ‘나의 서양음악 순례’ 에서 말했듯이 음악(예술)이 우리가 이성적으로 지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우리 신체에 직접 작용해서 깊숙이 침입할 수 있는 '위험한 어떤 것’ 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 책에서 서경식 교수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여인은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 “....지금의 나는 그 싫은 인간의 음악에 빨려들어요. 꺼림칙한 매력에 몸을 맡기고 매료당해요. 고통스러운 정도의 자기분열.....”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서경식 교수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느끼는 방법은 그 장대한 ‘무한선율’의 물결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취는 위험하다. 아우슈비츠의 이후의 음악은 도취와 각성 사이에 매달려 있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고 대답한다.  "배의 돚대에 자신을 묶어놓고 배를 떠나지는 않으면서도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저 위험한 괴물이 있는 곳에 가게 해달라고 울부짖는 것" 은 과연 가능한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바그너의 음악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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