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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회/한국사회

눈먼 자들의 국가 (김애란 외 지음, 문학동네 펴냄), 곁에 머물다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는 이 땅의 신학자들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세월호와 역사의 고통에 신학이 답하다 (조석민 외..

by 서음인 2016. 5. 28.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여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다룬 세 권의 책을 집어들었다. 각각 복음주의 신학자들(세월호와 역사의 고통에 신학이 답하다)과 진보적 신학자들(곁에 머물다), 그리고 작가들(눈먼 자들의 국가)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그날도 지금도 “가만히 있으라”고 위협하며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는데 급급한 이 땅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입에 담아가며 빈약한 신학과 천박한 역사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일부 교계 지도자들, 희생자와 유가족을 조롱하고 모독하며 모든 문제를 돈으로 환산하기에 급급한 죽음애자들과 맘몬 숭배자들이 도처에 득시글거리는 이 나라에 과연 희망이 존재하는가? “아, 묵시문학이 갈급한 때로다”라는, 김창락 교수의 글 제목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한 한 마디일지 모른다.

 

                                                                                                          

그날 이후 한시도....  쿠어억! 거대한 물기둥을 토해내면서 침몰하던 그것. 그것은 단지 하나의 배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그것이었다. 우리 사회, 가치관, 삶의 방식,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 끝도 없이 쌓아올려만 왔던 천박한 욕망의 덩어리, 단 한번도 결박된 적이 없던 탐욕의 시스템이었다.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풀려난 레비아탄이, 삼백 네 분의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들을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뱉어내는 소리는 그날 이후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라니? 어디로 가란 말인가? 욕망과 탐욕, 맘몬을 따르던 그때로 돌아가란 말인가? 나 하나의 일상을 보존하고자 애써 연약한 자들의 눈물을 외면하던 그날들, 양심, 정의, 공의, 섬김, 공동체, 희생, 이 모든 가치들을 내팽개치던 그 시간들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일상인가? (『곁에 머물다』이용주, 그날 이후 한시도.... 中)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는 유령 방송은 우리의 일상 속에 울려퍼지던 소리, 일상을 컨트롤하던 타워의 목소리, 우리가 호흡하던 공기, 우리의 내면을 누르고 있던 바위가 아니었던가. 일상의 흐름, 우리의 유사 평온, 가짜 평온은 그 목소리 아래에서 주어졌고 유지되었던 것이 아닌가. 문제가 없어서 문제없었던 것이 아니라, 문제가 없는 척했고,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문제를 감췄거나 미뤘거나 포기했거나 망각했기에, 문제를 정상으로 오인하며 자욱한 안개 같은 문제들 속에 함께 어울려 살았기 때문에, 문제없이 오늘 하루의 무사함을 심드렁하게 영위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혹시 끄떡끄떡 흘러가는 태평한 그날그날이 4월 15일의 세월호는 아닌가. (『눈먼 자들의 국가』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中)

 

'사고' vs  '사건'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므로 세월호 사고와 세월호 사건은 실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나는 후자의 비중이 이루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눈먼 자들의 국가』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中)

 

국가는 없다  세월호 사건은 예외적인 사건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실상이고 핵심이라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안다. 세월호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권력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타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권력은 인간을 버림으로서 존재하는 폭력적인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참사를 수습시키는 것은 그저 시간이고 망각이다. 타자를 인간으로 묶어주는 국가는 없다. 국가는 거대한 틈새 공(空)-간(間)이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감내하고 극복해야 하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재난일지 모른다. (『곁에 머물다』이찬수, 국가는 없다 中)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아,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신 겁니까? 어디 계시기나 한 겁니까? 어찌 우리가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 결국 당신의 뜻은 그들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그 죽음의 순간에 구조되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악행은, 우리의 사회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숭배의 삶에 초점이 맞춰진 이 사회는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또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나라는 단원고등학교 어린 학생들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곁에 머물다』 박창현, 세월호의 어린 영혼들과 함께 부활하소서, 예수여 中)

 

하나님의 뜻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 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겪는 어려움의 한 차원은 서로 연결되지만 구분되어야 할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을 성급하게 뒤섞은 잘못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적 상황 앞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를 묻고,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묻는 대신, 이 상황 자체는 이미 완결된 과거로 치부하고 그 배후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큰 뜻(섭리)을 물으려 한다. 보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큰 뜻(섭리)을 불러들이는 이런 성급함 자체가 종종 당면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분별하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회피하는 기제로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언사에 대중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다. (『 세월호와 역사의 고통에 신앙이 답하다』권연경,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뜻인가? ; 악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中)

 

길들여진 희망  통념적인 애도 기간을 보내고 나서, 사람들은 서둘러 희망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사회의 욕망의 공식이 희망이라는 언어를 강요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난 더욱 희망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회의 작동원리와 우리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인데, 어떻게 절망이 갑자기 희망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인가? .... 고삐 풀린 욕망이 일종의 공식이 되어 사회를 물들일 때, 왜곡된 희망은 문법처럼 탄생하여 사람들의 맘을 물들인다. 그래서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정말로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은 채 사람들은 그 희망의 문법에 길들여진다. 이 시대에 희망이라는 이름은 도리어 절망하는 사람들의 통곡의 자리마저 빼앗는 약탈자처럼 느껴진다. 뒤틀린 욕망의 공식을 따라 이 시대 희망의 문법은 비극의 잿더미를 뒤집어쓰고 진실을 더듬어 찾고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이데올로기처럼 작동하고 있다. (『곁에 머물다』김희헌 길들여진 희망 vs 희망의 자격 中)

 

연민이 아닌 수치를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은 참으로 게으로고 뻔뻔한 감정이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 세월호 유가족들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요구하며 스스로 진실에 요구할 통로를 확보하려고 싸우고 있다. 그들의 정당한 싸움이 ‘몹시 가여운 사람’ 이라는 사회적 온정주의의 선을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그들은 곧바로 시체 장사꾼으로, 혹은 불온 세력으로 매도되며 사회적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이러한 온정주의의 금지선들, 그리고 시혜의 논리를 반동적으로 활용하는 감성정치들이 정당한 싸움을 마비시키지 못하도록, 고통받는 이들의 표상을 여러 방식으로 균열시킬 수 있어야 한다. (『눈먼 자들의 국가』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中)

 

침묵과 중립의 자리는 없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과 중립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침묵과 중립은 그들을 해치는 폭력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침묵과 중립을 원칙으로 왜곡하는 자리는 사실을 힘 있는 자의 소리로 가득한 자리요, 고통을 주는 사람의 편으로 기울어진 사이비 중립의 자리일 뿐입니다. 중립이라는 너울을 쓴 침묵으로 군중을 몰아가는 거짓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난무하는 지금,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참 예언자의 목소리가 절실합니다. (『곁에 머물다』박숭인, 결코 지나가 버릴 수 없는 아픔 앞에서 中)

 

어떤 기억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형태의 기억을 취하든 간에 우리는 과거를 재구성한다. 즉 어떤 것을 기억하고 어떤 것을 망각해야 하는지를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서,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시간에 묻는다. 너는 어떤 선택을 통해 네 자신을 구성했느냐고, 그리고 그러한 선택과 결정을 통해 어떤 미래를 꿈꾸느냐고! 진실을 믿으며 정의와 사랑이 도래할 것을 꿈꾸는 사람인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자신의 권력 지향성이 빛어내는 망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그저 입장과 견해 차이일 뿐이라면서, 과거를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외면하는 사람인지.... (『곁에 머물다』박일준, 산 자를 위한 기억 中)

 

무엇을 할 것인가  두렵지 아니한가? 맞다. 세월호를 응시한다는 것은 공포의 체제를 직시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사람이 시신으로 미끄러지는 섬뜩한 경사면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무릎 굽힌 채 구멍 앞에 엎드려 있는 자, 곧 주검의 구덩이 속으로 처넣어질 자가 오늘의 나/우리임을 자각하지 않는 한 아우슈비츠의 고난을 아무리 떠벌려도 무의미하다고 경고했다. ..... 행동이다 움직임이다. 공포는 신체를 결박하고 운동은 불안을 해소한다. 우리는 망각의 부피를 줄이고 기억의 부패를 막는 글쓰기를 실행에 옮기고, 기억의 훼손을 방지할 이야기를 실천해야 한다.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은 그 재발 가능성을 예고하는 경보음으로서 대피행동과 연속된다. 말할 수 없는 죽은 자들을 대신해, 산 자로서 자임하는 의무다 ..... 한참이나 걸릴 선체 인양에 앞서 언젠가 국가가 괴물의 선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전시 수거하기에 앞서, 우리가 당장 뛰어들어 비극의 잔해들을 수집, 보존할 것이다. 그 진실고발과 현실보존의 책무로부터 이제 슬그머니 등을 돌릴 것인가? 체제가 원하는 대로 비겁하게? (『눈먼 자들의 국가』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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