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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모음/믿음을 묻는 딸에게 114

고통의 문제 I 예전에 제가 월급의사로 근무하던 병원이 있던 지역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새로이 그 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한 후 얼마 안되어서부터 이 지역에 유난히 다래끼 환자가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이곳에 다래끼 환자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질문하니 직원들은 제가 오기 전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갑자기 다래끼 환자가 늘어난것 것 같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병원 인근에 있던 안과 원장님께서 마취를 제대로 안하고 다래끼를 째는 바람에 환자들이 다래끼 수술에 대해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제가 충분한 마취를 시행한 후 비교적 통증 없이 수술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근의 다래끼 환자들이 몰려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누가 명의냐고 물으면 .. 2021. 2. 5.
내가 잘한 걸까요 낙도 지역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가족의 손에 이끌려 찾아오셨습니다. 가족들에 따르면 원래 활발한 성격이던 할머니가 10여년 전부터 점차 말수가 줄면서 집안에만 계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바빴던 가족들은 치매가 왔으려니 생각하고 그냥 집에 모셔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점점 더 일상생활을 잘 못하시는 것 같아 신경과를 찾아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치매 문제는 아니라면서 안과에 한번 가보라고 해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검사해보니 심한 백내장으로 시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당장 수술을 시행해 할머니는 시력을 회복하셨으며, 가족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몇 년 후 그때 뵈었던 할머니의 아들이 진료를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가 밝은 눈으로 .. 2021. 2. 1.
수술의 신 저는 백내장 수술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의사입니다. 이 말은 백내장 수술이 제가 거의 매일 경험하는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백내장 수술과정을 말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잠시 머리를 써서 전체 과정을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백내장 환자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면 저는 언제 어디서든 '생각 없이' 일사천리로 수술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가히 ‘몸에 익었다’ 또는 ‘몸이 기억한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백내장 수술이 단순히 제가 아무 때나 불러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도구'나 '하인'이 아니라, 독자적인 인격을 갖추고 나를 주관할 뿐 아니라 존중까지 요구하는 ‘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친숙한 동.. 2021. 1. 31.
티내는 사람, 삼잡이 할머니 어느 날 진료실로 중년 여성 환자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이 거북해 클리닉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눈꺼풀을 뒤집어 검사해 보니 결막에 흔히 생기는 이물의 일종인 ‘결석’이 발견되었습니다. 가볍게 제거해 드리고 나니 곧바로 불편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감사를 표하면서 진료실 문을 나가던 환자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자꾸 껄끄러운 느낌이 들고 티가 들어간 것 같아 옆집에 사는 ‘티내는 사람’을 찾아갔는데도 해결이 안 되서 할 수 없이 원장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에 시원하게 해결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그 환자에게 저는 ‘티내는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혹시나 해서 찾은 두 번째 옵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티내는.. 2021. 1. 30.
거울 속의 나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1. 1. 29.
편견과 고정 관념을 버려라 많은 봉사자들은 대개 특별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자신이 봉사하려는 나라에 접근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현지에서 겪은 일부 경험을 일반화시켜 ‘우리’와 다른 ‘그들’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강화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예는 특히 이슬람 국가들을 방문하는 봉사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슬림들이 우리와 달리 광신적 종교에 메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무슬림 여성들은 모두 시커먼 부르카를 쓰고 가부장 문화를 당연시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무슬림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단 한 종류의 정형화된 ‘무슬림’이 아니라, 여러 문화와 다른 생각과 다양한 종교성을 지닌 수많은 ‘무.. 2021. 1. 28.
죄의식과 수치심 의료봉사를 위해 중앙 아시아의 한 국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 나라에서 진행된 캠프는 시종일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현지 보건당국이나 의료진들을 포함한 병원 직원들은 모두 친절했으며, 몇몇 나라에서 그렇듯 병원 사용료나 직원들의 수고비를 요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체계적인 전문의 수련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의대 졸업후 본인이 원하는 과를 정해 스스로 진료하면서 경험을 쌓아가는 형태였고, 현지에 있던 안과 진료 및 수술용 장비나 기구들은 전부 고장나 있거나 너무 오래되어 거의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현지의 안과 의사들이 백내장 수술을 제대로 배우려면 수술 장비가 제대로 갖춰진 개인병원에서 고가의 돈을 지불하고 따로 트레이닝을 받아야 .. 2021. 1. 28.
‘빨간 약’을 드시겠습니까? - 계시록 읽기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문학작품을 들라면 요한계시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 책이 보여주는 종말, 휴거, 말을 탄 네 사람, 적그리스도, 666, 최후의 심판과 같은 무시무시하지만 매혹적인 환상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서구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수많은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켰고 현재도 판타자 문학이나 영화, 게임과 같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책을 진지하게 현실로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들은 임박한 종말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집과 재산을 팔고 광신적인 소중파의 일원이 되거나, 처참한 비극으로 끝난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을 위한 반란에.. 2021. 1. 27.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품으라 제가 처음으로 비전아이캠프를 위해 방문했던 나라는 동북아시아의 M국이었습니다. 봉사를 떠나기로 예정된 날 부푼 마음을 안고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오후에 출발할 예정이던 비행기는 현지에 있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지연에 지연을 거듭하다 월요일 새벽 3시 경에야 출발했고 세 시간여의 비행 끝에 월요일 새벽 5시에 마침내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봉사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 딱 3시간 전이었습니다. 바로 호텔로 이동해 짐만 풀어놓고 이미 환자들이 장사진을 차고 있을 병원으로 달려가야 겨우 약속했던 시간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앞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검색대에서 세관직원이 의료장비와 약품이 들어 있는 짐들에 대해 시비를 .. 2021. 1. 26.
‘유교적 칼빈주의자’들의 세상 - 목사의 딸 2016년 한 권의 책이 기독교계에 꽤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로 신구약 주석전집을 집필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고 박윤선 목사의 딸인 박혜란 목사가 쓴 『목사의 딸』 이라는 책이 일으킨 파문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한국의 보수 기독교계의 추앙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아버지에 대해 밝힌 내용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박윤선 목사는 저자의 어머니인 전처와 그 자녀들에게 지극히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종’인 자신의 목회와 학문적 성취를 위해 가족들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처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로는 그 소생들을 한때 고아원에 맡기려고 하는 등 방치하다시피 했으며, 자신 때문에 큰 상처를.. 2021. 1. 26.
왜 비전케어인가 2008년 비전케어라는 단체가 주관해 외래진료와 백내장 수술을 시행하는 해외 안과의료봉사인 비전아이캠프에 호기심 반 공명심 반으로 따라나선 일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한 번의 선택은 지금까지 13년간 11개 나라에서 열린 열아홉 차례의 캠프에 참가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중간에 단순 참가자에서 이사로 신분이 바뀌면서 단체의 운영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할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어 한 마디도 입 밖에 내기를 두려워하고 간단한 입출국 수속조차 힘겨워하던 소심한 시골안과 원장은 봉사의 현장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베테랑이 되었습니다. 2002년 안과의사인 김동해 이사장이 창설한 비전케어는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안과와 관련된 장단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국제실명구호단.. 2021. 1. 26.
왜 해외봉사인가 해외의료봉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분에 넘치는 칭찬의 말로 격려해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끔 “왜 꼭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해외에까지 가야 하는가”라고 질문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의외로 보수적이고 완고하신 분들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의제에 관심이 많은 분들 중에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구조적인 빈곤의 문제가 산적해 있고 우리의 이웃을 도울 역량조차 충분히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왜 굳이 세계의 오지에서 일어나는 가난과 분쟁에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일견 꽤 설득력 있고 타당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현재 고등학생의 경우 위화감을 조성하고 입시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해외봉사 참여를 수시모집의 봉사경력에 포함시켜.. 2021. 1. 21.
종교 간 대화와 종교 내 대화 한국 기독교인들의 배타성과 공격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훼불사건이나 사찰 방화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2018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1993년부터 2017년까지 24년간 기독교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훼불사건은 언론에 보도된 것만도 총 407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성서가 일점일획의 틀림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믿을 정도로 근본주의 성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은 오직 보수 정통 기독교에만 존재하며 타종교나 세상을 통해서는 신의 목소리나 구원의 방편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배타주의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20%에 가까운 한국에서 종교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기.. 2021. 1. 20.
매니큐어 하는 할아버지 우리 병원의 단골 중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십니다. 자그마한 키에 등이 약간 굽고 심한 흡연 때문인지 기침을 달고 사시는 이 할아버지는 잊을만 하면 지팡이에 온갖 약봉지를 주렁주렁 달고 찾아와 약을 타가곤 하십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할아버지는, 그러나 어디서나 눈에 확 띠는 분입니다. 언제나 길게 기른 손톱에 형형색색의 매니큐어를 칠하고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날은 수수하게 단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오시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네일아트를 받으신 듯 손톱이 정교한 무늬와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빨간 색 립스틱까지 콤비로 칠하고 오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료실 컴퓨터의 접수환자 목록에 그분의 이름이 뜨면 저는 반사적으로 오늘은 어떤 매니큐어를 칠하고 오실까 궁금.. 2021.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