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김동춘 교수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특별히 제가 흥미로웠던 지점 두 가지만 조금 상세히 지적하고 싶습니다.
1. 첫 번째는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입니다. 김동춘 교수님도 잘 지적하셨듯이 이번 사태에 관한 한 교회는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감염의 매개’, ‘치유의 공간’이 아닌 ‘감염의 온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를 그렇게 ‘부정한 장소’로 규정하고 심지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중시하던 주일성수마저도 포기하게 만든 주체가 ‘과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태에서 정결과 부정을 가르고 복과 화를 예언하는 우리 시대의 제사장과 예언자는 저 같은 의료인을 포함한 과학자들이었으며, 신학은 과학이 판단하고 결정한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급급했을 뿐 결코 이 사태의 주체가 될 능력이 없었습니다. 평소 예배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한국교회의 성도들 역시 바이러스 창궐로 인한 오프라인 예배의 중단을 별다른 저항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서, 과학이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 절대 다수의 무의식까지도 지배하는 최종심급의 자리에 굳건히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과연 이 사태 이후로도 불완전한 과학이 더 ‘높은’ 지식인 신학의 교도권 아래 놓여야 한다거나 과학적 지식은 성서의 문자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일부 근본주의적인 목회자나 유사과학 단체의 어설픈 논리가 이전처럼 성도들에게 쉽게 먹히게 될까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나 ‘기적적인 치유’야말로 참된 믿음의 증거라고 주장하며 틈새의 하나님(God of the gap)를 열심히 찾아다니던 일부 사역자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게 될까요?
저는 21세기 한국에서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가 ‘실재로’ 어떠한지를 그리스도인들 앞에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 상징적인 사건 이후로는, 일부 목회자들이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강단에서 마음껏 발산하던 아무말 대잔치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이 이전과 같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 두 번째는 ‘신앙의 공공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많은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나라가 마치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해 왔으며, 자신들이 누리는 신앙과 예배와 표현의 자유가 어떠한 사회적 간섭이나 동의도 필요하지 않은 당연하고 천부적인 권리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대한민국 인구의 20% 미만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당연하게 여겨온 ‘신앙/예배/표현의 자유’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천부적 권리가 아니라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비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모든 성원이 소중히 여기기로 동의한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민주 공화국의 이념이 우리에게 부여한 사회적이고 후천적인 권리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알려 주였습니다.
그리고 ‘정통’이든 ‘이단’이든 그리고 어떤 교리적 이유에서든 공공의 이익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그 이익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이 부여받은 자유를 조직의 유지/확장이나 신념의 전파/실천을 위해서만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종교집단은, 결국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되면서 그 자유를 제한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보여주었습니다.
과연 이 사태가 한국교회로 하여금 자신들의 게토에서 나와 ‘사회적 책임’이나 ‘공공성’과 같은 주제에 대한 건강한 논의를 시작하게 만들까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만, 이 사태 이후로 강단에서 목회자들이 교회의 본질이나 신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성도들의 귀에 더 이상 예전과 동일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몰고 온 교회사태] 김동춘 교수님 원글
지금 우리 사회는 <위험사회>로 진입해 있다. 산업사회가 개발을 통한 빈곤 탈출의 근대화를 추구했다면, 민주사회는 산업화로 인한 사회-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데 주력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가 예견하지 못한 <보건>, <환경>, <생명> 영역에서 불어 닥친 바이러스 감염의 불안한 터널 속에 갇힌 형국에 직면해 있다. 우리 사회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사라졌다. 동네 도서관, 학교, 생활체육실, 모임 장소 등 ‘공공’은 전부 불안하고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문제는 교회조차도 불안과 위험의 공간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교회는 세상의 구원 기관이요, 구원의 대리자였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사람이 가지 말아야 할 <불안전 지대>가 되었고, <기피 장소>가 되었다. <교회가 있는 곳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교회가 있는 곳에 감염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 형국이다. 지금 교회는 코로나의 공포와 불안에서 세상을 건져내는 <구원 주체>가 아니라 <구원 대상>이 되었다. 비록 신천지 교회지만, 방역팀이 강대상 곳곳에 거침없이 소독약을 뿌려대는 모습에서, 교회조차도 의료진의 방역없이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비유가 아닐까?
예로부터 교회는 병원과 함께 질병에서 고침을 베푸는 <치료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의 기도나 축사(逐邪)가 아니라 질본(질병관리본부)의 상황보고와 의료진이 질병에서 구원하는 치유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마스크"와 "세정제"만이 우리를 감염에서 보호해 주는 <치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지금 교회는 <은총의 매개 장소>가 아니라 <감염의 매개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기이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교회가 맞닥뜨린 새로운 사태
코로나 사태는 교회에 새로운 사태를 가져 왔다. 이 바이러스는 교회의 치유능력의 부재를 드러내 주었고, 주일예배 중단이라는 초유의 대재앙을 가져다주었으니, 지금 상황은 정확히 말해 <코로나 사태>가 아니라 <교회 사태>라고 불러야 한다. 이 사태는 교회 밖 세상을 <죄 많은 세상>으로 규정할 수 없게 하였다. 교회는 더는 <감염의 성역>이 아니라, <감염의 위험지대>가 되었다. 이제 교회는 더는 온 세상에 창궐하는 바이러스 병균의 우산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도피처>도 아니요, 염병, 악질, 전염병, 온역, 역병에서 보호해 줄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 됨으로써 교회 자신을 세상과 <구별짓기>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을 세상의 구원과 치유의 주체로만 자임해 왔던 교회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교회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료적 법 질서안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며, 교회 자신도 치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이 사태가 우리에게 던진 역설의 <은총의 계기>가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코로나 사태가 가져 온 새로운 교회사태는 거의 신성 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된 주일예배의 중지를 교회 스스로 결정하여, 신자들에게 교회에 나오지 말고, 가정에 머물러 가정예배나 동영상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예배를 목숨처럼 여기면서 삶 전체를 교회중심으로, 목회중심으로 사고하며 살아왔던 일선 목회자들에게 주일예배 중지라는 결정은 상상 이상의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던 일대 사건으로, 이는 분명 <교회 사태>로 기억될 것이다.
몰이성적인 <신앙지상주의>와 <예배지상주의>는 위험하다.
만일 코로나 감염이 언제, 어디서, 어떤 접촉으로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점에 <예배에 목숨 걸라, 하나님께서 다 치료해 주신다>, 이렇게 선동하면서 교인들을 무작정 교회로 불러들인다면,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그대로 신천지 종교집단이 초래한 패닉사태가 재현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배에 목숨 걸라> 하고 분별없이 설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주님의 양떼를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 사악한 목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 상황에서 <기도하면 코로나는 물러갈 것이다>. 이런 맹목적인 <신앙지상주의>는 매우 위험천만한 생각이다(그렇다고 하여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은 신앙관습을 고집하여 주일예배를 기계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보편 이성에 기반한 의료상식을 준수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므로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공멸하니까 그래야 한다. 교회가 의료법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로 많은 생명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교회의 목회자가 의료적 방역 규칙을 무시할 때, 다음과 같은 기괴한 발언이 등장하게 된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는 공공의 도로법을 어기며 불법적인 교회건축을 해 놓고서도 공공연하게 <교회는 세상법 위의 영적 법의 제재를 받는다>는 혼절 발언을 자주 일삼았다. 그런 지각없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지금은 의료법이 교회법 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은 목회자나 신자, 그리고 교회도 교회법보다 의료법을 준수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이 <이성에 합당한 신앙>이므로 그렇다. 의료법은 교회법과 필연코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의료적 치료법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전체 인류에게 주신 <일반은총의 선물>이므로 이를 치료의 도구로 잘 선용해야 한다.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기도나 믿음을 통한 <비상섭리>나 <특별은총>의 도구를 사용할 때가 아니라, 일반상식과 보편이성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일반섭리>와 <일반은총>의 도구를 생각할 때이다.
신앙은 많은 경우 이성을 넘어선다. 그러나 신앙은 언제나 이성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부족한 것을 이성과 합리성이 보완해 준다.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다. 좋은 신앙은 이성과 대화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전제로> 살아간다. 그리고 <신앙 우선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오로지 신앙으로만> 살아가지 않고, <이성의 협력과 조언을 들으면서> 살아간다.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은 지성을 희생시켜 가면서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다. 즉 <신앙에 이르는 길은 이해를 동반한다>.
주일미사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가톨릭 교회
이 시점에서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를 배울 필요가 있다. 가톨릭은 코로나 사태앞에서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처했다. 한국천주교회가 주일미사의 중지를 전격 결정한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전례를 소홀히 하는 가톨릭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부가 집례하는 주일미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재현되는 시간이고, 미사에서 축성된 영성체는 천국가는 노잣돈에 비유될 정도로 주일미사의 참여는 모든 가톨릭 신자의 의무다. 그런 가톨릭교회가 복음 전래 이후 236년 동안 멈춘 적 없는 주일미사를 과감하고 신속하게 중단하겠다고 공표했다.
혹자는 이런 결정을 가톨릭 교회가 “교도권”의 일사분란한 발휘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을 <가톨릭의 중앙집권적 교회정치> vs 대(對) <개신교의 개교회주의적 교회정치>의 차이라고 쉽게 단정짓는데, 이는 일반화의 오류이다. 개신교회도 교회는 하나이며, 보편적임을 고백하므로 얼마든지 공교회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
다만 가톨릭교회는 지금이 신앙의 <예외상태>임을 인정했다. 그래서 주일미사를 드리지 않고, 신자의 “묵주기도”, “성경봉독”, “선행”으로도 주일미사의 의무를 대신하는 “관면”을 선포했다고 한다. 관면(寬免)이란 가톨릭교회가 특별한 경우에 신자들에게 교회법의 제재를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지금 교회는 잠정적인 <예외상태>에 처해 있다. 특수한 상황에는 그 상황에 적실한 대응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가톨릭 윤리관이 채택하고 있는 <경우론 윤리, casuistic ethics>에서 나온 것이라 추론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배교도 아니고, 불신앙도 더더욱 아니다.
예외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은 정규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전시 상태의 군인이나, 이제 막 입대한 신병, 그리고 수용소나 감옥의 포로된 신자는 예배를 허용하지 않은 한 정규적인 주일예배를 드릴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기도와 성경묵상, 읊조리는 찬양이 예배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주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주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불가피한 상황에 봉착해 있을 때, 주일예배는 가정예배든, 동영상 예배든, 또는 개인적인 예배든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드려질 수 있다.
잠정적인 예배중단은 신앙의 후퇴나 배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판단에 따른 <공동선 행동>이다.
많은 교회가 주일예배를 잠정 중지하고, 동영상 예배로 대체하는 것은 편의적 신앙의 결과일까? 분명 여기에는 유튜부나 페이스북, 카카오톡을 손쉽게 다룰 수 있는 기술 환경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요즘 세대의 주일신앙의 후퇴나 편의주의에서 찾을 것만이 아니라, <공동선>의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 주일예배를 피해야 할까?: 공동선을 위해
주일의 교회는 가장 농밀한 <접촉의 공간>이다. 따뜻하게 악수하고, 환하게 웃으며 교인들과 대화하고, 때로는 포옹도 나누는 <대면의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접촉>을 멀리하고 <분리>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답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적 일상과는 정반대의 행동양식이다.
교회당은 다중(多衆)의 사람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장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하는, 접촉의 자리가 아닌가? 만일 교인중에 한 사람이라도 유증상자가 있거나, 그와 접촉을 한다면, 지금 신천지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공포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기 아주 적합한 곳이 바로 교회의 예배당이다.
주일예배의 중지는 신자들이 준수해 오던 규범화된 신앙규칙을 허무는 것이므로 개개인의 신앙양심에 상당한 거리낌을 가져 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누릴 수 있는 종교적인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타인과 이웃을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예방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 할지라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일 때 진정한 교회이다>라는 책임윤리의 태도이며, 모두를 위한 공동선이 된다.
공동선(common good)은 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을 생각하는 윤리적 덕목이다. 또한 공동선은 <사적인 선private good>보다는 <공적인 선public good>을 중시하는 윤리적 관점을 말한다. 나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공동선 윤리>는 그리스도인다운 합당한 행위인 것이다.
과잉해석과 극단논리를 경계하자.
그러나 너무 치우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특수한 상황에서 주일예배가 가정예배나 동영상 예배로 대체되고 있다 하여, 앞으로 <건물 교회>는 사라지고, <인터넷 교회>가 도래했다고 하거나, 더 이상 <대면예배>는 사라질 것이며, <동영상 예배>가 예배의 대세가 될 것이라는 섣부른 단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서 코로나 사태는 <교회관>과 <예배관>에 일대 혁명을 가져 올 것이라는 진단은 너무 성급한 해석이다. 물론 그런 예배의 공간이 더 확장되리라는 전망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교회당에서 (물론 반드시 예배당만이 아니다!) 대면예배로 돌아 갈 것이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예배, 공동체적 친밀감이 넘치는 예배를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과잉해석도 주의하자. 지금은 주일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이유불문 <야만적인 교회>로 간주될 지경이다. 반대로 주일예배를 재빨리 중단하는 교회는 가장 성숙한 교회요,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간주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주일예배를 중단하든, 존속하든, 그것은 교회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예배중지는 중대형교회에서는 필수적이지만, 가족적인 규모의 교회나 작은 교회조차 꼭 대면으로 드리는 주일예배를 포기해야 할까? 무엇이든 치우치면 위험하다. 바로 그것이 이단적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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