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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문학

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정은문고 펴냄)

by 서음인 2024. 10. 16.

<계엄>은 1979년 초 서울의 한 대학에 일본어 강사로 부임한 스물두 살의 일본 청년이 10.26 사태를 겪고 이듬해 초 귀국하기까지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겪고 느낀 일을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 소설입니다. 픽션이지만 저명한 영화학자인 저자 요모타 이누히코의 실제 경험이 많이 녹아들어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식민지 시대의 영향, 전쟁과 분단의 현실, 억압적인 군사정권의 존재, 가난과 지역차별, 동시대 문화예술인들의 활동 등이 복잡하게 얽혀 빚어진 1979년의 한국 사회를 차분한 필치로 생생하게 재현해 냅니다.

주인공은 한국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과거 일제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나이브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던 일본 바로 옆에는 일제의 식민지배로 고통받았고 전쟁과 분단을 경험했으며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면서도 지식인으로의 자긍심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에 가득한 학생들이 살아가는 나라가 존재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했던 경험은 주인공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기게 됩니다.

주인공은 여전히 그가 만난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만, 이제는 천박한 언사로 한국인들을 조롱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에게 한국은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타자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이 한국이라는 타자와 섞이기를 거부한 채 멸시와 혐오로 일관하는 ‘넓은 길’ 대신, 낯선 타자였던 한국과 정면으로 맞서 그 공과를 자신의 일부로 삼는 ‘좁은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소설이 격동으로 가득했던 한국 현대사의 한 시기를 제 3자의 시선으로 잘 복원해 낸 흥미진진한 풍속화인 동시에, 낮선 타자와 대면한 한 인간이 어떻게 성숙에 이르게 되는지 잘 그려낸 훌륭한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기 바랍니다. 특히 타자에 대한 혐오와 정죄야말로 바른 믿음의 길이라 확신하며 ‘넓은 길’만 선택해 온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읽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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