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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영성제자도

경이라는 세계 - 요약 (이종태 지음, 복있는사람 펴냄)

by 서음인 2025. 8. 27.

철학과 종교 예술과 영성의 시원은 경이(wonder)다. 경이는 영원과 초월을 향한 그리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초월 지향성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이다. 인간은 명사가 아닌 동사이며 궁극적으로 신을 향해 움직여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은 인간이 당신을 향하도록 지으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쉼을 모릅니다”라고 고백했다. 파스칼은 이 쉼을 모르는 마음을 ‘무한한 심연’으로 부르면서 이는 무한한 신으로면 채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근대인인 파스칼은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앞에 두려움을 느꼈으며 근대 이후 인간은 파스칼이 말한 두려움을 통해 철학과 영성의 시원으로서의 경이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과거의 세계는 텔로스, 도, 로고스, 섭리 같은 우주적 의미로 가득한 장소였지만 우리는 ‘탈주술화’(Disenchantment)되고 계몽된 시대, 즉 ‘성인이 된 세계’(world come of age)에 살고 있으며, 이는 의미의 위기와 상실을 초래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근본기분인 멜랑콜리(melancholia)의 원인이다. 우리가 사는 재미와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경이를 잃었기 때문이며, 이를 되찾기 위해서는 ‘재주술화’(Reenchantment of the world)가 필요하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세계의 ‘탈주술화’란 인간이 세상을 인지로 파악 가능하고 인력으로 지배 가능한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세계에서 주술을 몰아내는 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이 선포한 유일신 종교는 자연의 무대에서 신들을 몰아내고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는 신을 선포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자연 뿐 아니라 역사 무대에서 활동하는 신도 부정한다. 종교가 주술을 쫒아냈고 과학이 종교를 쫒아냈다.

 

모더니티 옹호자였던 베버는 현대인이 지적 자살 없이 종교를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과거의 인간이 의미가 붙박이 되어있는 코스모스를 집 삼아 거주했다면 현대인은 의미와 무관한 텅 빈 공간을 부유하는 존재다. 이에 대해 베버를 포함한 현대 사상가들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이기에 주체적 선택을 통해 이 세상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허무주의로 경도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인간 주체를 재주술화함으로서 ‘의미의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C.S.루이스는 인간이 의미 있는 세계 안에서만 의미 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이 세계 안에 내재된 의미로움과 경이로움을 깨닫고 이 세계의 경이에 올바로 충분히 반응할 때에만 경이와 충만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사실’과 ‘가치’는 각각 ‘객관’와 ‘주관’이라는 별개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보는 현대의 이원론인 ‘주관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다. 그는 모든 것을 객체화 대상화하는 손은 결국 인간 자신도 물체화한 끝에 결국 ‘인간 폐지’를 불러오고 말 것이라고 비판했다.

 

찰스 테일러는 세계 안에 의미가 붙박이로 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적 세계관이나 중세 기독교신학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만이 유일한 의미의 소재지라는 ‘주체로의 전회’(turn to the subject)나 의미나 가치가 우주를 향한 인간의 주관적 투사에 불과하다는 ‘투사주의’(projectivism)를 극복해야 하며, 그러한 극복이 ‘재주술화’의 요지라고 강조한다. 테일러에 따르면 인간의 가치/의미경험은 ‘strong evaluation’(강한 의미의 평가)을 내포하는 체험이며, 이는 우리가 세계를 ‘의미의 소재지’(a locus of meaning)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테일러는 이 세상을 ‘wonder-full’, ‘meaning-full’한 곳으로 알아보는 체험이 충만(fullness)며, 인간에게 누구나 fullness를 향한 갈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이 충만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철학적 탐구의 주요 주제로 삼는다. 이는 이 세계의 충만을 알아볼 뿐 아니라 그 안에 내가 몸담게 되는 체험이다.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이러한 충만에 대한 갈망, 동경, 그리움을 일으키는 페어리테일이다. 루이스가 ‘사랑스러운 거짓말’(lovely falsehoods)로 번역되는 '페어리테일'(fairy tales)을 쓴 이유는 주술이 지배하는 고대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 싶은 형이상학적 비전과 특별한 종류의 갈망을 가장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페어리테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비치는 창조자의 영광에 몸소 참여하고 싶은 갈망, 즉 영혼 깊이 자리 잡은 재주술화의 갈망이다.

 

루이스는 이러한 특별한 종류의 그리움을 ‘JOY'라 불렀다. 이는 누리는 것이라기보다 겪는 것이며, 영혼을 압도해오는 어떤 허기 혹은 갈증 같은 것이다. 루이스는 모든 사람 안에 이런 초월을 향한 동경과 영적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고 이 그리움이 우리를 신에게로 인도하는 한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을 믿기 전에 초월을 동경했고, 그런 그리움과 동경의 길에서 하늘이신 신을 만났다.

 

루이스는 자연을 지배하고 조작하려는 시도와 기술로서의 마법에 빠져 있던 시대는 중세가 아니라 초기 근대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대에 탄생한 과학의 뿌리에는 시대정신이자 근본 욕망인 ‘리비도 도미난디’(지배욕, libido dominandi)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반대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 즉 세상 모든 것을 인간이 마스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리비도 도미난디의 눈이었다. 루이스에 따르면 과학으로 알 수 있는 세계만을 정말로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로 여기는 탈주술화된 현대 세계야말로 주술에 걸린 세계다.

 

인간의 지적 탐구심을 가리키는 말은 두 가지가 있다. 중세 시대의 용어는 면학심(스투이어시타스, studiositas)로 사랑에 기반해 아는 것을 더 깊이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리나 근대의 앎인 호기심(큐리오시타스, curiositas)는 호기심을 풀고 정복하고 싶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경이의 눈이 상대의 신비를 응시하는 눈이라면 호기심의 눈은 신기한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눈이다.

 

데카르트는 지식이 경이를 몰아낸다고 말했다. 도킨스는 과학의 발달과 그로 인한 지식의 증대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더욱 경이로운 곳으로 보게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인 키츠는 세계를 정교한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로부터 모든 매력을 축출한다고 한탄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연을 더 큰 실재를 가리키는 표징, 즉 ‘초월의 암시’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경이는 ‘현전’(presence)이 곧 ‘존재’(Being)라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해체시킨다. 키츠는 과학과 경이가 양립불가능하다고 본 것이 아니라 당대에 등장한 기계론적 철학이 얼마나 세상을 보는 좁은 눈인지, 그것이 철학의 이름으로 어떻게 철학의 시원을 부정하는지를 말한 것이었다.

 

루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플라톤 철학을 창조적으로 이용해 기독교의 고유한 세계관을 설파한 사상가요 영성가였다. 플라톤은 참 철학인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로 하여금 기독교 세계관의 초보를 미리 알려준 일종의의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였다. 그의 세계관은 지상의 실재들은 천상의 실재들을 가리켜 주고, 또 그 초월적 실재들에 참여하고 있는 거룩한 표징들이라는 ‘성사적(sacramental) 세계관’이다. 세계의 탈주술화는 과학혁명 이전 중세 후기에 일어는 유명론 철학의 득세에 따른 플라톤 철학의 퇴조와 이에 맞물린 성사적 세계관의 붕괴에서 기인했다.

 

태초에 삼위일체라는 장엄한 관계와 장엄한 춤이 있었다. 신은 고독한 일자가 아니며 삼위일체라는 관계를 본질로 가진다. 이는 삼위 하나님이 세상이 있기 전에도 사랑했고 사랑으로 존재하셨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시며 세상 모든 것은 다 그 절대적 사랑의 관계로부터 비롯되었다. 창조란 신 안에 가득했던 사랑이 신 밖으로 흘러 넘쳐진 ‘사랑의 범람(overflow)’의 결과다. 신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창조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테오리아’(theoria)는 철학적 ‘관조’라는 말로 쓰이기 전에 축제를 보러 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모든 축제가 종교 축제였던 당시에 이는 곧 예배를 보러 간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리고 예배를 본다는 것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에 몸과 마음을 담아 참여하고 깨달음과 변화를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루이스가 그리는 신은 우리가 그 앞에서 춤출 수 있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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