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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톰과 새관점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톰 라이트 지음, 에클레시아북스 펴냄)

by 서음인 2016. 5. 26.

1. 소위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대표주자중 한 명이면서 가장 대중적인 저술가이기도 한 톰 라이트가 바울에 대해 저술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이 책을 드디어 만났다. 루터 이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여겨진 이신칭의나 전가된 의와 같은 개념을 총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언약신학의 맥락에서 새롭게 기술하고 있는 이 책과 만나는 것은 기존의 사고가 전부 뒤집히는 당혹스러운 경험이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만난 멋진(과연 명불허전!) 가이드와 함께 미지의 땅을 탐험하는 매혹적인 모험이기도 했다.


2. 저자는 다소의 사울이 가장 강경한 샴마이학파의 바리새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사울이 진정으로 바란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셨던 구원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는 의미이며, 그 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유대인들이 토라를 준수하게 하고, 토라를 모르는 이방인들을 거룩한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는 사울이 전통적 바울신학에서 강조하는 주제인 행위로 얻는 의나 이신칭의와 같은 무시간적이고 비역사적인 구원의 체계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고, 그러한 개념을 바울에게 적용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3.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한 예수님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한 중간 지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의 마지막에야 행하시리라고 생각했던 그 일을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통해 행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바울은 1)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죄와 사망을 포함한 모든 권세에 대해 승리를 거두셨으며 2) 그 예수의 부활 안에서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유배생활이 끝나며,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이 오래도록 기대하던 종말의 새 시대가, 비록 바울이 기대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이미 시작되었고 3)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부활하신 예수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야, 즉 이자 4)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피조물이 그 앞에 복종해야 하는 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4. 복음이란 루터 이래로 주장되어 온 바대로 이신칭의의 가르침, 즉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방식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 아니라 바로 이 메시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메시야, 즉 예수가 곧 주이시라는 선포이다. 이신칭의의 교리 자체는 결코 복음이 아니며, 오히려 복음에 내포되어 있다. 즉 복음이 선포될 때 사람들은 믿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의 일원으로 여기시지만(이신칭의), 복음 자체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선언이다.


5. 이러한 바울의 메시지는 (1) 이교 세계와 그 세계관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으며, 舊 종교사학파의 주장과는 달리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이라는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유대적인 메시지였다.  또한 바울은 (2) 유대교 역시 창조된 본래의 목적에 맞는 직무를 수행하는데 실패했으며, 복음이란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그 일에 성공함으로서 유대교의 오랜 이야기가 예수 안에서 절정과 성취에 이르렀다는 기쁜 소식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바울은 그가 진정한 유대교 신학이라고 생각한 것을 전파했으며, 그것은 균열되고 몰락한 이교가 행하는 모방과 명백히 대조되는 실체요 진품이었고, 신앙 없는 이스라엘이 달성하는 데 실패한 그 소명에 대한 성취였다.


6. 저자는 “하나님의 의” 란 루터 이후의 개신교 신학이 가르쳐 왔던 것처럼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부여하시는 의의 상태(전가된 의 imputed)가 아니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신실하심의 일부로 믿는 자들에게 무죄가 입증된 피고가 소유하는 의의 상태를 부여하시며,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 작용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리신 은혜로운 판결의 결과로 사람이 의로운 신분을 얻고 의롭다고 선언(칭의)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 란 여전히 하나님 자신의 특징이며, 하나님이 믿음의 댓가로 사람에게 부여하시는 의의 상태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을 차가운 사무거래를 연상시키는 법정적인 은유가 아닌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면에서 이해하게 된다면 그 교리의 핵심은 ‘사랑’이 될 것이다.


7. 저자는 예수 자신과 그의 주권적 왕권에 대한 대한 복음선포가 바울사상의 핵심이기에 칭의는 바울사상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1세기에 칭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며, 바울 역시 그리한 무시간적 구원의 체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바울에게 칭의란 어떻게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느냐, 그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속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따지는 문제였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칭의는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선언이며, 구원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교회론에 관한 것이다. 복음을 공동체를 창조하며 칭의 교리는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8. 저자에 의하면 바울이 거부하는 것은 (지금까지 율법주의라고 알려진) 도덕적인 의나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고, 유대인으로서 언약적인 지위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었고 음식법이나 할례 인식일 준수라는 언약적인 표식으로 구분된 의가 언약백성의 일원임을 보증해 줄 수 있다는 주장이었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이신칭의). 이러한 칭의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진정한 언약가족의 일원으로 선언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믿음이란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한 허기증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 백성의 일원임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표지이다.


9.또한 칭의는 복음을 믿는 자가 서로를 차별할 수 있는 어떤 요인과도 상관없이 하나님 가족의 참된 일원이라고 선언하는 교리이기에, 그 자체가 교회일치를 위한 위대한 선언이며 분열에서 일치를 위해 수고하도록 교회를 이끈다. 따라서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어떤 것으로 하나님 백성의 일원임을 구분 지으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하며, 심지어 저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교회의 일원임을 정의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우상숭배이다. 사람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지 이신칭의 교리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


10. 교회의 선교가 의미하는 바는 세계에 복음의 내용, 즉 예수가 이 세상의 주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를 개인의 전도, 즉 미래의 천국을 위해 각 사람의 영혼을 한 명씩 구출해 내는 일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복음을 세상 가운데 확실히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세상의 모든 영역 가운데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복음전파와 사회적 활동이라는 재앙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11. 행위로 얻는 의라는 개념이 1세기 유대교의 범주라기보다는 중세적인 개념이며, 루터가 가졌던 소위 내성적 양심을 바울에게 투사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며 범주 오류라는 저자(또는 새 관점학파) 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복음을 구원의 체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선포로 정의함으로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고질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 복음의 총체성이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 역시 탁월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지 이신칭의 교리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며, 칭의란 교회일치를 위한 탁월한 교리라는 저자의 주장도 (물론 존 파이퍼는 동의할 것 같지 않지만)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상당히 적실한 지적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바울의 사상을 구약의 언약신학과 1세기 유대교라는 맥락에서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재구성해내고 있는 그의 결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고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그의 이러한 광범위한 재구성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는 성경본문에 대한 전문적이고 철저한 주석적 연구를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 문제로 나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앞으로 몇 권의 책으로 진실의 근사치에나마 접근해 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단은 판단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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