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위기는 저같이 직업상 수술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의사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본문입니다. 레위기의 聖-俗/정결-부정 개념이 수술실에서의 소독-오염 개념과 놀랄만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2. 수술자가 일단 손을 씻고 소독된 가운을 입으면 그때부터는 주변 사람이나 사물과 구별되어 ‘소독된’, 즉 ‘거룩한’ 상태로 바뀝니다. 만약 이렇게 ‘거룩해진’ 사람이나 사물이 그렇지 않은 영역과 접촉하게 되면 그 사람 혹은 사물은 ‘거룩’을 상실하고 ‘오염’된 혹은 ‘부정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며, 실수건 부주의건 수술방에서 감히 이 ‘거룩’의 영역을 침범한 자는 아마도 당장 ‘천둥 같은 진노의 음성’뿐 아니라 수술 후에 떨어질 모종의 ‘불벼락’까지 감수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거룩’을 상실하고 오염된 사람이나 사물은 소정의 절차 (정결의식 혹은 재소독)을 거쳐 다시 ‘거룩’을 회복해야 다시 수술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인류학자 펄 카츠가 이 과정을 <낮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인류학 입문서에 실린 ‘수술실 이야기’라는 글에서 재미있게 분석했네요^^
3.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살펴보면 마치 수술실에 의사도 아니고 소독상태도 아닌 웬 정신 나간 사람이 들어와, 오염된 사람 혹은 사물도 자신이 만지기만 하면 전부 소독된 상태로 바뀐다고 큰소리치고 다니면서 (인간 소독기? 정결의 전염!), 치료를 빙자해 기존의 '소독 및 치료의 매뉴얼' 을 깡그리 무시하고 소독과 오염의 경계를 깨뜨린 채 사람이든 사물이든 마구 만지면서 돌아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만약 내 수술방에 그런 ‘놈’이 들어온다면 당장 멱살을 잡던 경찰을 부르던 얼씬도 못하도록 쫓아내고 고소라도 하겠습니다만, 그 꼴을 3년씩이나 두고 보다니 당대의 고위사제층이 참을성이 많았다고 해야 되는 걸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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