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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역사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 - 한 역사학자의 시대 읽기, 하나님의 뜻 찾기 (이만열 지음, 포이에마 펴냄)

by 서음인 2016. 5. 27.

이 책은 국사편찬위원장과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이만열 전 숙명여대 교수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매도되는 시기에서 시작하여 ‘더 잃어버린 시대’로 드러나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와 교회 그리고 삶의 모습을 살피며 신문이나 잡지 혹은 페이스북에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이 시대에 산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 허튼소리라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책의 제목처럼 “잊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시대를 향한 소리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말은 넘치나 진실은 희귀하고, 생물학적 어른은 많으나 존경받는 원로는 드물며, 보수를 참칭하는 자들은 널렸으나 참된 보수의 가치는 실종되어버린 이 어둠의 시대에, 올곧은 삶과 예언자적 음성으로 참된 기독 지성인의 모범을 보여 준 이 원로 역사학자의 날카롭고 원숙한 혜안을 통해 과거의 우리를 반추하고, 부끄러운 현재를 직시하며, 바람직한 미래를 숙고해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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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오뎃과 에브라임의 네 지도자   (역대하 28장 8-15절에서) 동족 유다를 치고 많은 포로와 노획물을 얻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동족상잔의 죄악성을 직시하고 동족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동족을 노략질하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승리를 만끽하려는 북 이스라엘 장병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람들은 준열히 꾸짖고 회개하라고 외쳤다. 이것은 오늘날 동족끼리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가 아닐까? ...... 일부 목회자들조차 입에 거품을 물고 ‘종북’, ‘종북’을 외치면서 이념논쟁에 부화뇌동하고 있을 때, 그래도 ‘화해와 평화’만이 이 땅의 영구분단을 막고 통일의 희망을 길이라는 것을 믿고 외쳐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일 터이다. 저 사마리아 성의 오뎃이라는 예언자와 에브라임 자손의 지도자 네 사람같이, 동족을 유린하고 얻은 자신들의 승리를 오히려 부끄러워하면서, 벗은 자에게 입히고,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곪은 상처에 기름을 발라주면서 이 땅에 용서와 화해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우리에게 역사의 의미는   과거와 현재를 매개해주는 역사는 현재 속에 과거를 재현해주는 놀라운 복원력을 갖고 있다. 이 복원력은 때때로 전통의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공동체를 지탱하는 주체성으로 형성지어지기도 한다. 한 공동체의 전통과 주체성은 역사의 복원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창출이 불가능하다. 역사를 모르면서 자기만의 전통을 말할 수 없다. 역사를 외면하는 공동체는 자기의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역사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한 공동체로 하여금 공동체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공유물이다 ...... 역사는 인류사의 진행 과정을 통해 정의의 길과 불의의 길,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길과 멸망으로 이끄는 길, 협력 평화를 추구한 길과 갈등 전쟁의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를 밝혀준다. 역사는 또 인류가 궁극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향해 전진해왔음을 보여준다. 역사는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자유화되어가며 공동체적으로는 평등화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역사가 개인적인 자유과 공동체의 평등을 위한 방향으로 움직여갔다면 그 방향에 서서 삶을 살아간 자들이 역사에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시대를 호령했던 존재라도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삶의 방향을 외면하거나 그것을 되돌렸다면 그는 시간 속에서는 살아 있을는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는 죽은 자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 시대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역사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 속에 죽어있는 자도 영원 앞에서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역사는 무서운 심판이요, 희망적인 가능성이다.

 

4.19 혁명 회상   4.19혁명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록하고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고양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한국은 식민지 국가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록한 몇 안되는 모범적인 나라라고 칭송되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가장 중요한 계기가 바로 4.19혁명이라고 이해한다 ...... 어떤 이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대별하면서, 이들 양대 세력을 적대적인 관계로 이분화하는 경우도 본다. 또 어떤 이는 한국이 산업화를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는 서로 자극을 주면서 발전해왔으며, 꼭 선후를 가려야 한다면 한국의 민주화가 산업화를 견인했다고 믿는다. 민주화가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신장시켜갔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자발적인 산업화세력이 형성되어갔던 것이다. 한국 산업화의 견인역할이 민주화에 있었다면 그것은 4.19혁명으로부터 재래된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다.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 해방의 역사의식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을 자산으로 하여 그걸 나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식민지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서 그때 그렇게도 원했던 도움을, 지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나누자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정치적 종교적 이유와 사회적 관행으로 인권을 유린당하고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민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씻겨주고 먹거리를 챙겨주자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성숙한 민족이 되자는 것입니다. 약한 민족들을 섬기고 때로는 그 민족들로 하여금 주체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도록 돕자는 것입니다. 저는 늘 우리 민족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식민지 백성으로서 자유가 없이 고통을 겪었으니, 과거 우리가 겪었던 것과 같은 고통과 눈물에 싸여 있는 약소민족에게서 그 눈물을 씻겨주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성숙한 민족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식민지를 경험한 민족이 가질 수 있는 성숙성입니다.

 

한국 교회, 자기 신학이 있는가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혼란스럽고 부패해가는가? 거듭 말하지만, 자기 신학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했다고 하지만 그 성장에 비해서 종교적 영성은 고사하고 윤리적, 도덕적 영향력마저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것은 왜 그럴까? 나는 한국 교회가 신학화에 대한 고민과 진통을 제대로 겪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 남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듯이, 수입신학 가지고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영성적 문제를 풀어가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수많은 교회와 신학교 , 무수한 신자들이 있음에도 한국 교회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자기 신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우리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풀어가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제 한국 교회도 자기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학문 외적 여건은 어느 정도 조성되었고, 이를 통해 세계 교회에 기여할 때도 되었다고 본다. 언제까지 남이 제공해 주는 ‘우유신학’, '수입신학‘에 머물러야 하는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종교인들이나 지성인들은 옳고 그른 것을 밝혀야 할 시대적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시비를 가리고 곡직을 밝혀야 할 시점에 지성인들이 침묵의 행렬에 자기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왜곡 못지않은 병리현상입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시비곡직을 분명히 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선에 머물게 하는 보신주의로 나가게 합니다. 지성인들의 벙어리 현상은 이 땅에 귀머거리 대중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예’를 ‘예’라 하지 못하고 ‘아니오’를 ‘아니오’라고 말 못하는 현상은 급기야 우리 사회에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게 변하면 공동체적 가치가 파괴될 것은 뻔합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함석헌이 1950년대 이승만의 시대를 향해 외쳤던 것이 바로 지금의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 우리 신앙인들은 어쩌면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상대로 갈멜산에 나아간 엘리야와 같은 심정으로 오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치하에서 이쪽저쪽 눈치를 보며 어느 편이 이익이 되는가, 어느 것이 현실적인가 주판알을 굴리는 백성을 향해, ‘여호와냐 바알이냐’ 선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눈치 보기에 익숙한 백성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와 같이 이 침묵을 깨고 나갈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목 차

                                                                               

책머리에 

                                                                                                       

1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_한국 사회를 생각한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 세월호 진실규명은 역사의 요구다 | 팽목항을 다녀와서 | 감히 말하는 자가 없어졌다 | 공짜 지하철 타는 신세이고 보니 | 대학 평가에 대한 단상 | 우리 사회 속의 특권의식 | 소말리아를 생각한다 | 다락밭 정책과 4대강 사업 | 우파 속의 종북 | 종북, 공북, 화북 | 선지자 오뎃과 에브라임의 네 지도자 | 중립화 통일론 | 괴뢰와 사팔뜨기 | 풍선에 실어 보내는 사랑 | 신은미 선생 | ‘12월 19일’ 그리고 김이수 헌법재판관 | 대법원은 언제까지 국민의 인내만 요구할 것인가 | 일본의 역주행을 우려한다 | 분노하라 |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2 역사란 무엇인가 _역사를 생각한다 우리에게 역사의 의미는 | 상에 얽힌 이야기 | 목회자와 역사의식 | 을사늑약 108주년에 전시작전권을 생각한다 | 국권상실과 고종 책임론 | 2·8독립선언 95주년 | 4·19혁명 회상 | 다시 7월 4일을 보내는 소회 | 역사교육강화방안을 제대로 시행하려면 | 물타기 수법과 물귀신 작전 |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반대한다 

 

3 일생지계 재어근 _인생에 관한 짧은 생각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 | 강사료에 얽힌 이야기 | 다음에는 청첩장을 꼭 보내지요 | 나의 독서 편력 | 일생지계 재어근 | 거창기행

 

 4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_한국 교회를 생각한다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 한국 그리스도인이 수행한 민족사적 과제 | 권서와 사경회 | 기록 보존과 문화민족 | 한글 운동과 그리스도교 | 한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 변천사 | 아합왕이 소집한 국가조찬기도회 | 한국 교회, 자기 신학이 있는가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가난 실천과 작은 교회 운동 | 〈복음과상황〉 20년을 고민한다 | 한국 교회의 죄책 고백 문제 | 표절과 그 두둔 세력 | 그들은 천당이 있다고 믿을까 | 섬기는 것과 누리는 것 

 

5 역사에 살아 있는 사람 _그들을 기억한다 옥한흠 목사를 기리며 | 방지일 목사 | 안병무 선생을 추억함 |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 | 화해의 사도 이승만 목사 | 김교신 선생 | 함석헌: 먼저 그 의를 구하라 | 74주기를 맞아 도산 안창호 선생님 영전에 아뢰나이다 

 

맺음말을 대신하여 _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발문 _내가 만난 이만열 교수 _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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