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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화해와 해방 (얀 밀리치 로호만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by 서음인 2016. 5. 30.

1.체코 출신의 저명한 신학자로 바젤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저자는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구원사와 세속사 사이의 관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성서적 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이 두 차원의 긴장을 견디어내지 못한 채 기독교를 속세를 단념하고 내세의 복락을 약속해 주는 ‘민중의 아편’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일시적인 문화적 부산물로 만들어 버림으로서 구원의 총체성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구원’이란 신앙을 예전화 혹은 세속화라는 방향으로 일차원화 하려는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다차원적이고 포괄적인 용어이며, 구원에 대한 우리의 증언은 총체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2. 구약성서가 증거하는 이스라엘의 전체역사는 구원과 해방의 역사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종말론적 차원을 가지며, 이러한 구원과 해방의 소망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로 인한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악한 우주적 세력들 특히 죽음에 대한 승리로 실현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한 실재이자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종말론적 목표이며, 우리의 현재 속으로 밀고 들어와 지금 여기에서 현실적인 삶의 실재들에게 영향을 주고 현재의 상황을 변혁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미래적 종말론적 실재에 상응하여 (1) 지금 여기에서 (2) 이웃 가족 직업 정치적 삶을 포함한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의 표징들과 그 나라의 징조들을 진지하게 건설함으로서 예수의 모범을 따르도록 부름받았다.

 

4. 구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인격, 그리고 그의 사역 속에서만 발견된다. 신약성서의 구원관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성취와 권위라는 점에 있어서는 예외 없이 서로 일치하며, 여기에 익명의 여지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사도들이 선언했던 구원은 오직 나사렛 사람 예수의 모습을 띤 구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 일원론(축소주의)과 그리스도론적 집중을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자기의 우산 아래로 한데 불러 모으려고 했던 자기중심적이고 종교적인 어떤 인물의 성공담이 아니며, 모든 경계를 넘어서서 전체 인간성을 감싸 안은 선교를 하나님이 어떻게 수행하셨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론에 뿌리박고 있는 구원은 그 범주가 보편적이며, 그 안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신 것이지 그리스도인이 되신 것이 아니다.

 

5. 성서적 표상에 의하면 이름은 인격과 사역의 본질을 드러낸다. (1) 위엄 있는 메시야(그리스도) 의 칭호를 가진 사람은 바로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 나사렛 예수였다. 이 사실은 구원의 길이 영적이거나 비밀스러운 지식을 요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구원받은 사람들의 윤리적 의무는 엄격하게 그의 가르침과 생애에 맞게 실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구원자를 의미하는 예수(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가 신약의 여호수아로 그의 해방사역을 완성하며 따라서 구원이란 해방사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2)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야)라는 이름에서 암시되는 정치적 권력의 용어로 그의 선교를 이해하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배격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종말론적인 현존으로 약속되고 그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부활사건 후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예수에게 사용한다.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그의 메시야적 신분에 대한 확인이며, 메시야이신 예수는 이스라엘 구원의 약속에 대한 계승자이자, 새로운 계약의 중보자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를 통해 구원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예수의 사역을 개인적이고 자의적이며 우연적인 영역에서부터 구출하려는 시도이다. 그리스도의 업적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며,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업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약속을 물려받고 있고 구원의 역사에서 예언자적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계시자이자 증인이었으며 그의 교훈은 구원사의 구조, 즉 종말론적이고 메시야적인 배경 아래 그 자리를 갖는다. 또한 그 사역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였으며, 그것은 자유와 정의, 사랑과 은총으로 요약될 수 있다. (2)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를 위태롭게 하고 파괴시켜 버린 죄의 불화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으로 그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독특하고 유일회적인 종말론적 구원을 행하셨으며,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영웅적 성취가 아닌 죽음까지도 감수했던 예수의 선구자적 복종에 근거해 있다. (3) 이신 그리스도는 독재자가 아닌 나사렛 출신의 봉사자였고 그 분의 길은 구원의 능력이었지 권력을 통한 구원이 아니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성서적 전망은 일차적으로 교회론적 토대를 가지지만 동시에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 전개되며, 구원의 윤리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왕적 직무에 대한 우주론적 지평, 사적 종교운동이 아니라 공적 구원의 운동으로 이끈다.

 

7. 구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화해의 사건이며 이는 신약 메시지의 핵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적대감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화해의 주체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아울렌이 주장한 고전적 견해에 의하면 이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사망의 절망에 내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들어와 고통을 받고 투쟁하고 마침내 세상을 정복하는 해방의 하나님이시며, 화해와 세계의 해방에 전념함으로서 더 이상 세상을 숙명적으로 파멸과 죽음에 내맡기지 않겠다는 절대적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중보자와 화해자로서의 그의 역할이 분명해지는 곳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서이며,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은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제자직과 선교를 그 소명으로 가지게 된다. 이러한 화해의 제자직은 값싼 감상주의적 태도나 동정심이 아니며 화해의 사역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되고 우리에게 도래하는 구원을 바라보며 화해와 평화를 위해 용기 있게 투쟁해 나가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일치적인 화해의 질서를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화해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세계적이며 정치적인 무대에까지 확장해야 한다. 분열과 분쟁은 파괴 곧 구원의 파괴를 뜻하기 때문에 이단 그 자체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이웃과 세계를 위해 그 분을 찾아야 한다.

 

8. 성서의 계시나 구원, 속죄는 신화나 형이상학, 또는 신비적 황홀경의 절정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이라는 결정적인 해방과 자유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발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출애굽의 정신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 죄수들, 눈먼 자와 압박받는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했고, 종말론적 약속이 지금 성취되어 비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마지막 해방의 시간이 준비되고 있음을 드러냈으며, 이러한 해방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1) 방종과 무제한이 아닌 계약 안에서 누리는 자유, 계약에 신실한 자유이며 (2) 타인에 대한 사랑의 자유이자 약자와 타자의 자유에 관심을 가지는 자유이며 (3) 끊임없는 투쟁과 현실적인 속박 속에서도 인간은 이미 해방된 존재이며 이러한 희망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 희망 안에서의 자유다. 이와 같이 부활로 인해 성취된 해방과 자유에는 행위의 응답, 즉 선교의 노력이 뒤따르며 이는 우리가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자유와 해방을 가로막는 구조적인 악의 정신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9. “그의 신학은 철저하게 전통적이고 철저하게 현대적이다. 철저하게 복음적이고 철저하게 사회적이다. 철저하게 신학적이고 철저하게 윤리적이다. 철저하게 화해를 말하고 철저하게 해방을 말한다. 철저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충실하면서도 철저하게 믿음의 정치적 사회적 실천에 충실하다.  사회 정의를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투쟁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막상 그 교회가 칼빈과 바르트를 박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개탄하기도 한다. (정권모)” 과연 WCC 총회를 앞장서서 반대하며 정통, 보수, 개혁주의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한국의 일부 목사들이 오랫동안 WCC 운동에 참여해 온 로호만 교수보다 더 개혁주의의 전통에 충실하며 더 복음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맘몬과 성공을 숭배하며, 온갖 정체불명의 신학도 부흥에만 좋다면 뭐가 됐든 환영하는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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