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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로날드 사이더 지음, CLC 펴냄)

by 서음인 2016. 5. 28.

1. 젊은 시절 Christianity Today 紙에 의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신앙서적 100권중 하나로 선정된 <기아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이라는 책 (이 책은 ivp 에서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을 통해 처음 만난 이후, 로날드 사이더는 내게 불편하지만 멀리할 수는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복음주의의 신앙적 전통에 확고히 서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라는 자신들의 게토에서 나와 정치 사회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그다지 편안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이렇게 불편한 그의 생각이야말로 전체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로 보고 제대로 살아낼 수 있게 해주는 해석학적 열쇄라는 확신이 점점 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명이 “성경적 기초에 의거해서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을 갱신하는 데 조력하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으로 활동하는 것” 이라고 믿는 이 급진적 복음주의자는 이 책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두 사명 (mission) 의 영역을 포괄하는 총체적 복음을 뒷받침하기 위한 성경신학" 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

 

2. 저자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네 그룹으로 나눈다. 


(1) 빌리 그래함이나 도날드 맥가브란으로 대표되는 개인주의적 복음전도 양상에 의하면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개인적 죄사함의 메시지이고 전도란 이 메시지를 말로 전하는 것이며, 교회의 유일한 사명은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이라고 주장한다. 설령 존 스토트처럼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모두를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인정하는 경우에도 복음전도가 최우선이며 사회적 정의의 추구는 우리의 최우선적인 사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2) 존 하워드 요더로 대표되는 급진적 재세례파 양상에 의하면 용서와 중생이 복음의 핵심이지만 교회의 존재 또한 복음의 중요한 일부이며, 교회는 구세대의 질서에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하고 메시야 왕국의 가치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하는 공동체가 됨으로서 간접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교회의 온전한 실존이야말로 교회의 핵심적인 사명이며 복음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식은 직접적 참여보다는 기독교 공동체의 구조를 통해서이다. 


(3) 주류 교회일치운동 양상은 구원이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기에 개인과 사회구조가 모두 전도나 복음화의 대상이며, 개인의 회심과 사회의 정치적 개선이 함께 복음전도와 구원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관점은 WCC 의 입장인 자유주의적 하위유형과 리차드 마우 올란도 코스타스의 입장인 보수주의적 하위유형, 그리고  보수주의적 하위유형과 매우 비슷한 로마 가톨릭의 하위유형으로 나뉜다. 


(4) 세속화 신학이나 종교다원주의신학, 해방신학자인 호세 미란다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세속적 기독교 양상에 의하면 전도란 정치적 행위이고 구원은 사회적 정의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억눌린 자들을 위해 정의를 찾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은 가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이나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기도 한다.

 

3. 복음이란 단순히 개인적인 죄사함이나 구원의 소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기에 예수님처럼 살기 원하는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의 중심을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한다. 개인적인 죄의 용서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회적 악들이 제거되고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이 땅과의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는 살롬 (Shalom) 의 성취를 그 본질로 하는 하나님 나라는 메시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겠지만, 지금도 복음을 선포하며 악에 도전하는 용서받은 제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4.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모든 종류의 악에 도전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억압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 및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분이 창조하신 새로운 공동체의 존재를 통해, 그리고 다양한 비폭력 저항의 수단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도전했으며 그 결과 당대의 기득권 세력은 예수님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체제의 악에 대한 예수님의 도전의 본질은 악한 인간과 체제의 배후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영적 전쟁이었으며,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현실체제에 대한 그분의 도전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예수님은 이 타락한 세상 안에서 이미 시작된 그의 나라의 가치들과 요구들에 따라 지금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모인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 존재와 행동을 통하여 모든 종류의 악에 대해 급진적으로 도전해야 한다.

 

5. 성경에서 회개와 회심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그분을 무조건적인 주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때 일어나는 생각과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사회적 죄를 포함한 과거의 죄에 대한 후회와 돌아섬, 용서의 경험, 세례 그리고 점점 성장하는 제자도의 삶은 모두 성경적 회심의 일부이다. 이러한 성경적 회개와 회심은 하나님과 이웃과 맺은 우리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따라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해 의를 행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값비싼 순종은 구원하는 믿음과 분리될 수 없다.

 

6. 성경적 사회운동가들은 복음전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만 그쳐서는 안되고 (1) 세상의 주님이시자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2) 복음전파와 이웃사랑을 강조하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3)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영광스러운 종말론적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전도를 행해야 한다. 또한 복음전도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1) 하나님과 예수님이 가난하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2) 성경의 모든 가르침들이 사회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3)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인 모든 인류의 육체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복지를 위해 일해야 하기 때문에 (4) 죄로 인해 왜곡된 사회의 구조와 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싸움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구제, 개발. 구조적 변화의 모든 분야에서 사회적 변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자선이나 개발 뿐 아니라 구조를 바꾸려는 ‘정치적’ 시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1) 구조적 변화가 더 효과적이고 도덕적으로 유익하며 덜 우연적이기 때문이고 (2) 사회적 존재로 지음받은 인간이 악한 사회체제 내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며 (3) 성경의 하나님이 억압적인 경제구조와 사법구조를 정죄하셨으며 개인적인 죄 뿐 아니라 사회적인 죄도 혐오하시기 때문이며 (4)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한 구조의 배후에 존재하는 사탄적인 권세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7. 불의한 구조들을 바꾸기 위한 사회적 행위와 복음전도는 불가분의 상호 연관적 관계를 가지지만 서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복음전도의 목표는 제자화이며 사회행동의 목표는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정신적 행복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행위는 복음전도적인 목적이 있을 때에만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며, 이 행위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든 그렇지 않든 독자적인 성경적 타당성을 가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이라는 두 영역 모두에 부름받았으며, 선교 (mission) 라는 용어야말로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두 사명을 포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이다. 복음전도는 사회운동과 비교해 보았을 때 논리적 우선성을 가지지만 예수님의 모범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양쪽에 거의 동일한 양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독교 선교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관심이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 안에서 함께 공존할 때 완전해질 수 있다.

 

8.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수는 특히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공산권의 붕괴로 자유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복음전도의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복음전도와 사회적 관심이 함께 가야 한다는 점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선교를 위해서나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극히 적은 액수만을 헌금하고 있으며, 현대의 세속주의, 과학주의, 물질주의가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세계의 가난은 간과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는 이단이요 전략적으로는 우둔한 것이며, 현대 세계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관심을 모두 실행하며, 성령의 갱신하는 능력을 점점 더 간절히 간구할 뿐 아니라 열정적으로 생각하고 전략을 구상하며, 교회를 세우는 동시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헌신된 기독교인들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9. 로날드 사이더의 주장은 철저히 복음적이고 철저히 성경적이다. 그런데 왜 우리 대부분에게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이 모두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 영역에 동일하게 헌신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몇 구절 나오지 않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그렇게 흥분하면서도 성경이 그렇게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사회정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거나 오히려 기꺼이 불의의 편에 서기를 선택하는 것일까? 그가 말했듯이 성경 전체에서 빈곤과 사회정의에 대한 본문들을 모두 오려낸다면 성경은 누더기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라고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론 사이더의 주장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의 주장이 귀에 거슬린다면 자신이 어떤 성경, 어떤 복음을 믿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깊이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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