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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그리스도와 권세들 (핸드리쿠스 베르코프 지음, 대장간 펴냄)

by 서음인 2016. 5. 28.

1. 드디어 핸드리쿠스 베르코프 (Hendrikus Verkhof 1914-1995) 의 <그리스도와 권세들> 을 만났다. 이 주제를 다룬 유명한 월터 윙크의 책들을 포함하여 제법 여러 곳에서 이름을 들어 오다 보니 한국어로 태어나기 전부터 나와는 이미 친숙해진(?) 책이다. 읽어 보니 1953년에 초판이 나온 이 오래된 책이 2014년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해줄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 

 

2. 바울은 롬 8:38-39, 고전 15:24-26, 엡 1:20-21, 엡 2:1-2 골 2:15 를 포함한 다양한 본문에서 ‘우주적 권세들 (exousiae)’ 에 대해 언급한다. 저자는 바울이 이 용어를 당대의 유대 묵시문학에서처럼 천사나 사탄 같은 영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지배하는 다양한 지상적 존재의 체제나 구조들에 대한 집합적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시간 (현재와 미래), 공간 (깊음과 높음), 생명과 사망, 정치와 철학, 율법을 포함한 정치적 종교적 규칙, 공동체의 구조들, 별들의 운명적인 운행 (stoicheia) 과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 삶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권세’ 와 ‘통치자들’의 정체라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이 이들 지상적 구조들이 인간에게 가하는 속박의 무게를 강조하기 위해 유대 묵시문학에서 초지상적인 인격적 권세를 일컫던 ‘권세’ 나 ‘통치자들’과 같은 명칭을 차용한 후 비신화화 (demythologyzing) 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묵시문학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주로 천상의 천사들로 여기지만 바울은 그들을 지상적 존재의 구조들로 보며, 역자의 표현을 빌자면  “권세들은 은유의 풍성한 상상력에서 생명을 공급받아 형이상학 속에서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현실을 바탕으로 역사하는 실존적인” 존재다.

 

3. 이러한 권세들은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매개하는 중계자이자 도구로 창조 세계 내에서 긍정적 역할을 하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타락 이후 이 권세들은 신과 같이 되어 (갈 4:8),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요 실체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인간에게 자신들을 섬기도록 요구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 엡 2:2) ’요 ‘이 세상의 통치자들 (고전 2:6)’ 이 되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도 이 권세들은 여전히 인간 사회가 혼돈에 빠지지 못하도록 지켜 주고 있으며, 세상을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의 일부로서 그리스도의 해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붙드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권세들 아래서의 삶은, 무정부적 혼돈의 상황과 비교할 때, 그런대로 괜찮아 보일 뿐 아니라 때로는 심지어 좋다고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상대적인 경제적 안정과 신분의 상승을 경험했던 히틀러 체제하의 일반 독일국민의 삶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그런 삶은 종살이이자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삶으로, 심지어 하나님 아래서의 해방된 삶에 비하면 차마 ‘삶’ 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수준일 뿐이다.

 

4.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음에서 살아났을 때, 그리고 그 이후 구속사건이 선포되는 곳마다 세계 권세들의 지배는 끝이 났다. 이전에 권세들은 세상의 신들이자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실재로 여겨졌으나, 십자가가 선포되는 곳마다 가면이 벗겨지고 무장이 해제되었으며, 만물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십자가 사건 이후  권세들은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폐위된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참된 권세 안에서 그들이 창조질서 안에서의 원래 역할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모든 반기독교적 권세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맞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반항조차도 하나님께 협력하는 일이 될 뿐이다. 이렇게 가면이 벗겨지고 적나라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그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인간을 강력히 장악할 수 없게 되었으며, 사람의 의식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그의 주권의 흔적을 사라지게 함으로서 그들의 지배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5. 교회는 세상의 이러저러한 이즘 (-ism) 을 쫒지 않고 권세들의 기만을 간파한 사람들로 이뤄진 공동체이며, 세상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권세들 아래서의 안정된 삶을 철저히 박살낸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권세들의 정당성에 대한 심판이자 권세자들의 지배가 종국에 이르렀음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세상 권세들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공격이 교회의 존재 그 자체이며, 신자의 의무는 직접 권세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다. 만일 교회 자체가 권세들에 대한 저항과 공격이 아니라면, 교회가 자신들의 삶과 교제를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권세들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 시대의 신들에 대한 모든 저항과 공격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권세들이 폐위된 곳에서 사람들은 ① 세속주의 ② 니힐리즘 ③ 권세의 복귀 (파시즘, 나찌즘) 등으로 반응해 왔으나, 교회들이 말씀을 통해 존재 자체를 통해 그 속에 있는 교제로부터 얻는 생활양식을 통해 강력한 증거를 나타내고 교회의 경계 저편에 있는 사람들의 양심에 통렬히 호소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주권과 교회의 존재를 수용하게 될 것이며, 권세들은 ④ 기독교화 (Christianization) - 탈이념화, 탈신성화, 수단화 - 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6. 이 인상적인 책에 대해 몇 가지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1) 바울의 ‘권세’를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지상적 구조나 체제로 간주하는 베르코프의 이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복음주의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세’ 가 초자연적 존재를 의미한다는 전통적 입장을 견지하며, 이 주제를 자세히 탐구한 월터 윙크의 경우도 권세를 단순히 구조가 아닌 물질적 구조의 영적 차원으로 간주한다. 또한 복음주의 영성신학자인 마르바 던은 그의 책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에서 영적 권세가 현실 속에서 제도나 사회적 구조로 구현되어 있다는 윙크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권세들은 물질적 제도나 구조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들과 맞서는‘영적 전쟁’은 단지 제도 개혁을 위한 노력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세상 권세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공격은 교회의 존재 그 자체’ 라는 저자의 주장이 또 다른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있겠다. 교회가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은 크게 보자면 정의로운 전쟁과 비폭력 평화주의, 개혁주의 교회와 재세례파 교회, 라인홀트 니버와 존 하워드 요더로 이어지는 오래고 격렬한 논쟁의 주제인데, 제세례파 전통에 해당하는 이 주장이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목사인 저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3)  역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번역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때 “반세기 이상 지난 책을 지금 번역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과연 현대인들에게 유익한 작업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세월호 참사에서 이 책을 번역해야 할 이유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역자의 말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권세들의 역사를 뚜렷이 목격했다. 국가 권력, 사법 제도, 행정 체계, 종교 등 사회의 총체적 구조가 타락한 권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을 보았다. ..... 우리 손으로 뽑은 지도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권세를 보았다. 우리가 세운 행정 체계에서 자기 보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경시하는 자들을 통해 권세를 보았다. 심지어 우리는 일부 목사들의 언행 속에서 적그리스도적 권세를 보았다. 마치 군대 귀신이 들린 자처럼 세월호는 여러 권세들을 환히 드러내며 침몰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나치 시대의 '제국 기독교인' 들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 나 ‘제도’ 라는 이름의 ‘세상 권세’를 섬기면서도 예수를 믿고 있다는 착각속에 빠져 살아가는  이 땅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귀 있는 자마다 들어야 할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 아니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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