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십자가는 1976년에 초판이 나온 오래된 책이다. 게다가 빈곤이나 전쟁 같은 심각한 사회 정치적 의제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 목소리를 내온 ‘급진적 복음주의자’로 <타임> 지에 의해 미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5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저자 짐 월리스는 돈과 시간을 들여 자신의 책을 사서 읽는 독자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는 놀라운 ‘은사’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40년 전에 그것도 미국에서 나온 이 책은 IVF 김종호 대표의 추천사를 빌자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통찰하는 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확한 예언자적 통찰”을 보여준다. 마치 70년대 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다.
정사 권세 국가 짐 월리스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착취와 폭력, 경쟁과 증오, 이익과 권력 추구라는 총체적 순환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이 순환의 최종적 목적지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순환을 주도하는 ‘정사’와 ‘권세’는 원래 인간의 삶을 섬기고 보존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경험을 매개하도록 창조된 존재이나 반역과 타락 이후 자신들이 궁극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지닌 절대적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종으로 삼고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오늘날 국가, 계급, 인종, 정치, 여론, 국익, 도덕, 전통, 종교, 사상, 이데올로기와 같은 이 세상의 권세 중 가장 위험한 우상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유지되는 현대 국가 체제다.
십자가와 부활 성서는 이렇듯 인간과 체제를 장악하는 죽음의 순환을 그 본질로 하는 세상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간의 역사에 하나님 나라라는 전혀 새로운 실재가 들어오면서 철저히 무너졌다고 선포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들이 모두 담합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권세들의 가면을 벗기고 무장을 해제시켜 무력화함으로서 그들의 주권이 절대적이라는 신화와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권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삶의 양식대로 살아가는 공동체의 존재야말로 세상에서 권세들의 통치가 끝나고, 죽음의 순환 고리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기성 교회 그러나 오늘날의 기성 기독교는 이와 같은 성서의 증언을 묵살한 채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질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고 합의와 순응을 통해 사회를 결집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성서를 인간이 만든 교리의 한 조항으로 격하시키고 종교적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복음을 정치와는 무관한 사적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그 결과 교회는 예언자적 권위를 잃고 불구가 된 채 가이사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영적인 것에 매진하는’ 고분고분한 신자들의 모임, 기성 체제를 위협할 변혁성이 제거된 ‘순수한’ 복음만을 전하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복음이 인간의 삶과 사회라는 광범위한 문제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서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교묘하게 그리스도를 하찮은 분으로 만드는 일이며, 사회정의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이 덧없는 현 체제의 지배적 가치와 가정들을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시민종교화한 기독교’는 정통의 탈을 쓴 거짓 종교일 뿐이다.
회개 제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왕이신 주님의 요구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회개와 제자도로의 부르심이야말로 복음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러한 부르심은 주류 문화의 지배적 가치와 체제 순응적 삶의 방식과 단호히 결별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은 국가와 그 체제의 삶을 특징짓는 국가주의 및 탐욕과 폭력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권세들이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할 뿐 아니라 그것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라고 강요할 때,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그의 나라에 궁극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란 자신의 믿음을 말과 논리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와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술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언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질서를 밝히는 요약인 산상수훈이다. 이러한 회개와 제자도로의 전환은 새로운 신학이나 가치 체계를 요구하지 않으며, 성서적 신앙을 재발견하고 그 통찰을 새로운 형태의 사회 정치적 참여에 적용하려 하는 복음적 정신에서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하나님의 계시에 견고하게 서지 못한 기독교는 세속적 사고방식을 반영하거나 그러한 사고방식에 아무런 설득력 없는 차원과 해석을 제공하게 될 뿐이다.
공동체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헌신과 제자도를 요구하는 성서의 메시지에 따라 부와 권력을 숭배하는 세상의 가치를 단호히 거부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드러내는 대안적인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도록 부름받았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이미 시작된 새로운 시대와 지금 시대가 긴장을 이루며 공존하는 삶이며,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성서적 백성과 공동체의 존재는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신호이자 구원이 이 세상에 실재하는지 여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신 복음의 스캔들과 십자가의 어리석음이야말로 모든 교회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삼아야 할 패러다임이며, 스스로 낮아져서 폭력과 갈등의 현장에 함께하며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그 자체로 이 땅의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는 제도와 가정들을 진리로 무력화하는 혁명적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독특하면서도 혁명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방식은 직접 권세들을 물리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이 일은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셨고 앞으로도 그분이 하실 일이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권세를 물리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과 삶으로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을 통해서이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과 화해, 즉 십자가라는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도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면서 예수가 거부한 정치적 힘과 무력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구원과 화해를 위해 택하신 하나님의 방법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선을 이루기 위해 악과 타협하겠다고 결정할 통찰력이나 도덕적 권리가 없으며, 세상의 현실을 고려한 ‘책임적 존재’ 혹은 ‘기독교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과 신약성서가 말하는 십자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종의 방식 사이에 조화란 불가능하다. 성서적 백성이 종의 모습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 이것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능력이다.
요더와 니버 국가체제를 비롯한 세상의 질서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비타협을 강조하며, 산상수훈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급진적인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짐 월리스의 입장은 존 하워드 요더로 대표되는 아나벱티스트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입장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참여 그 자체가 아닌 참여의 방법과 관련해서다. 과연 윌리스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사회변혁의 방법은 세상 질서를 철저히 거부하는 대안적 공동체가 되어 악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대해 비폭력 저항을 행하는 것뿐인가? 그리스도인은 결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책임윤리’에 따라야 하는 공무, 혹은 정치와 관련된 직업에 종사할 수 없는가? 과연 ‘선한 의도’란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면제해주는 ‘그린라이트’인가? 요더와 니버의 두 길 사이에서 아직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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