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 히브리서의 기자는 바울, 요한과 함께 신약의 3대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각각의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응하는 창조적인 기독교 신학의 출현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에서 나타난 독특한 신학적 사고는 ①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예수의 제사장직 개념과 ② 대속죄일 의식을 통해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2) 히브리서는 흔히 신학 논문 내지는 장편 설교로 간주되나, 사실은 긴박한 목회적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 쓰여진 낭독용 편지다. 그 목적은 수신자들이 마음을 바꾸어 파국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특한 신학적 논의를 발전시켰으며(task theology), 독자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강력하고 광범위한 수사학적 기교를 이용한다.
(3) 히브리서는 현대 독자에게 낯설고 혼란스럽게 느껴지는데 이는 ① 자주 나뉘거나 윤리적 훈계에 의해 끊어지는 논지 ② 세례 이후의 죄에 대해 엄격히 다루는 것 ③ 자의적인 성경 인용 ④ 현대인에게 낯설고 잔인해 보이는 희생제사를 핵심 범주로 사용하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① 예수를 예언의 정점이자 천사보다 우월한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고 ② 불완전한 옛 제사와 비교되는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영원한 효과를 강조하며, ③ 11-12:2절에 걸쳐 믿음의 영향에 대해 강조하는 부분은 수사학의 힘과 강력한 감정적 호소력을 보여 준다.
2. 독자들의 상황
(1)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 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 개종자들 ② 사도행전 6-7장의 믿음에 복종하게 된 제사장의 큰 무리 ③ 고린도에서 개종한 유대인 ④ 구약과 관련해 기독교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하려는 이방인 기독교들 ⑤ 예루살렘 멸망 이후 교회와 회당 사이에 발생한 분리와 적대감을 극복하려는 기독교인들.
(2) 히브리서는 수신자들의 모임에서 읽혀지도록 쓰여진 편지이다. 기자는 사랑받고 존경받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었으나 현재는 그들과 떨어져 있다. 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자에게 그들이 직면한 긴박한 위기의 극복을 위해 개입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사정상 그들에게 직접 갈 수 없었던 기자는 응답으로 히브리서를 써서 보냈다. 히브리서가 수신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기 위해 사용 가능한 모든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편지가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3)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속죄의 선포를 포함하는 복음을 받았고, 세례를 통해 과거에 저지른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세례 후에 지은 죄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사한다는 사실을 믿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속죄제사와 그와 결속된 회당의 음식이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해 유대교로 복귀하려 했다.
(4) 따라서 수신자들은 희생제사와 관련된 회당예배와 단절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기독교 예배에 참여하도록 격려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 예배가 수신자들의 현재와 미래의 죄를 해결한다는 확신을 필요로 했다. 히브리서는 대속의 제사인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하면서도 지속적인 효력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설명함으로서 이 문제의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① 그리스도에게 속죄에 요구되는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제사장직’ ② 예수의 희생적 죽음에 영원한 효과를 부여하는 ‘새로운 언약의 시작이라는 종말론적 개념’ ③ 속죄제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제공하는 ‘대속죄일 의식’을 이용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5)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에게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적절한 반응인 '믿음'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① 기자가 설명하는 믿음의 도리를 받아들이고 ②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미래에 현실화될 소망을 견고히 붙잡으며, ③ 믿는 바에 합당한 적극적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결국 저자의 목표는 수신자들을 강력한 수사학적 기법으로 감정적으로 고양시켜 현재의 생각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들이 새로운 확신과 양심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삶과 예배에 참여하게 하며, 믿음에 합당한 도덕적 특성과 고난의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것이었다.
3. 저자 장소 연대
히브리서의 기자는 전통적으로 바울로 여겨져 왔으며, 어떤 학자들은 바나바 아볼로 누가가 기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히브리서 기자를 신약성경에 언급된 특정 인물과 동일시하는 것을 극히 꺼린다. 수신자를 나타내는 ‘히브리인들에게’라는 표제는 유대인 기독교인 집단을 의미할 가능성이 가장 많으며, 저작 장소나 수신 장소에 대해서는 지중해 연안에 살았던 비교적 잘 교육받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추측 외에는 명확한 것이 없다. 저작연대에 대해서는 ① 성전이 아닌 장막만 언급된다는 것과 ② 2세대 기독론의 특성을 가진다는 것 때문에 성전파괴 시점인 AD 70년 이후로 주장하는 견해가 있지만, 린다스는 ① 히브리서의 기독론이 골로새서 1:15-20절 이상으로 발전되지 않으며 ② 제사제도의 무용성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AD 65-70에 쓰였을 것으로 주장한다.
4. 사상의 배경
① 훌륭한 헬라어 문체(아티카 헬라어)와 능숙한 수사학 기법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린다스는 율법의 제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수신자들의 공동체가 사도행전 6-7장의 헬라파 유대인들의 선교활동의 열매일 것이라고 추축한다. ②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강조에서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영향도 읽을 수 있다. ③ 일부 학자들은 ‘땅의 장막과 하늘의 장막’의 대조나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인 율법’과 같은 본문을 근거로 히브리서가 성경 석의에 플라톤의 전통을 사용하는 필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④ 에른스트 케제만은 종교사학파의 영향으로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유랑이나 안식 등의 주제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⑤ 저자는 히브리서가 헬라적 유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그 외의 외부 사상이나 종교 체계로부터의 영향은 없으며, 히브리서의 주요 사상은 주로 초기 기독교의 케리그마에 빚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히브리서 질문>
1. 히브리서에는 배교 후에는 회심이 불가능하다는 본문들이 자주 나옵니다. 이 본문들은 교회사 내에서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과연 이 본문들이 확고한 교리를 세우기 위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배교의 위험에 처한 수신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까요? 이 본문뿐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논란이 되는 여러 본문들이 교리를 세우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교리적’인 본문인지, 특정 상황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주어진 ‘목회적’ 권고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요?
2. 저자인 바나바스 린다스는 히브리서 수신자 공동체가 가진 위기의 핵심이 ‘해결되지 않는 죄의식’이었다고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크리스터 스탠달 같은 저자들은 사도바울을 포함한 성서시대의 유대인들이 살아갔던 시대는 “수치의 문화”가 지배했기에, 그들에게 근대 서구를 지배하는 “죄의식의 문화”나 그에 근거한 “성찰적 양심” 같은 개념은 매우 낯설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죄의식’이 히브리서를 관통하는 문제의 핵심이라는 린다스의 생각은, ‘죄의식’이라는 근대 서구인들의 사고틀을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히브리서에 역투사해 읽어낸 오독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3. 지난번 레위기 공부를 통해 동물 제사에서 제물에 안수하는 행위가 ① 제사자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transfer)하는 것이라는 견해와 ② 제물과 제사자의 동일시 혹은 대체(substitution)가 그 본질이라는 견해가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전자의 경우 예배자의 죄를 제물이 대신 뒤집어쓰고 희생되는 '대속'이, 후자의 경우는 예배자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자기희생'(self-sacrifice)이 제사의 본질이 될 것입니다. 김근주 교수님은 “삶과 분리된 제사나 자기를 희생하지 않는 제사는 그 자체로 모순일 뿐 아니라, 그저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혹시 후자의 견해가 더 본질에 가깝다면 히브리서의 해석은 레위기 제사 본문에 대한 불완전한 독해의 결과가 아닐까요? 아니면 히브리서를 따라 후자의 견해를 전적으로 틀린 것으로 간주해야 할까요? 아니라면 둘 다를 긍정하며 히브리서를 이해하는 또다른 길이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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