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역사가들』은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의 역사학과 교수인 마크 길더러스가 지은 서양사 연구 입문서다. 저자는 240여 페이지 남짓 되는 이 두텁지 않은 책에서 고대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의 역사적 사유의 변천 과정을 간략하면서도 깔끔하게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 존재하는 일견 혼잡해 보이는 여러 관점과 주제를 가진 다양한 역사‘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들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렇게 많은 역사‘들’ 앞에서 혼란을 느끼는 대신 인류의 과거에 대해 알려주는 진실한 이야기들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역사를 국정화하겠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이성을 상실한 참람한 권력자들과 밀실에 암약한 채 지금도 불철주야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 단 하나의 공식 역사를 지어내느라 여념이 없는 분들이 한번쯤 귀기울여 들어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다.
역사 연구의 목적과 동기 그리고 과정 인간이 역사를 연구하는 목적은 (1) 역사적 존재인 인간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영국의 역사가 로빈 콜링우드는 “인간에게 타고난 본성이란 없으며 단지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고 말했다. (2) 역사적 행위에 대한 보편타당한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서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역사가 토머스 액튼 경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단 하나의 공평한 기준으로서의 도덕성”이 존재하며 역사가는 이 기준을 지키는 중재자로 활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3)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이해함으로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과거를 반복하는 형벌에 처해진다”고 단언했다. 또한 역사가들은 (1) 과거에 대한 단순한 흥미와 호기심에서 (2)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원인-결과 관계를 정의함으로서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를 알아내기 위해서 (3) 인간의 개인적 정체성과 집단적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4) 의도적인 인간의 행동이 초래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고찰하기 위해서와 같은 다양한 동기로 역사 연구에 임하게 된다.
역사가는 탐구의 첫 번째 단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역사적 행위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라고 질문하면서 자신의 탐구를 시작하며, 두 번째 단계에서는 “왜” 라는 질문과 함께 행위자와 사건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합리적인 인간의 합리적 행위’라는 모델 외에 요즘에는 경제관계와 계급관계를 중시하는 마르크스의 모델이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행위자의 숨겨진 의도를 찾는 심리사적 모델과 같은 다양한 모델들이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역사가는 “어떻게 사태는 좋거나 나쁘다고 판명되었는가? 누가 이익을 얻었고 누가 고통을 얻었는가? 그 결과는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사건의 결과를 판단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역사의식의 등장 서구 문명의 전통은 높은 수준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유대인과 기독교인 그리고 희랍인들의 유산에서 발전해 나왔다. (1) 고대 이집트인들이나 수메르인 앗시리아인들은 위대한 인물들의 위업을 기록한 목록과 연대기를 남겼지만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2) 유대인들은 역사적 사건들에 의미와 구조를 부여했고, 역사를 통해 신의 손길과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발견했다. 그들에게 역사란 의미 없는 순환이 아닌 잘 알려진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3) 희랍인들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기 위해 과거를 비판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는 신의 개입을 배제한 완전한 세속적 역사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인간사의 행로를 인간의지의 산물로 이해했으며, ‘역사의 아버지’ 투키디데스는 신의 행위를 배제한 인간의 행위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객관성과 공정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4) 5세기의 기독교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인 것(인간의 도시)과 신성한 것(신의 도시)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역사의 원리로 정립했으며, 뚜렷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도시에 대한 신의 도시의 최후 승리와 신자들이 역사를 초월한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역사철학은 이후 중세 1000년간을 지배했으며, 중세의 역사서술은 초자연적인 힘을 다시 역사에 끌어들임으로서 희랍의 접근법을 바꾸어 놓았다.
근대의 역사의식 근대의 역사의식은 초자연적인 설명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과거를 세속적 접근법으로 연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은 역사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혹은 최종적 원인에 대한 탐구를 포기했으며, 객관적이고 엄격한 증거에 의거한 역사서술을 선호했다. (1)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제도화된 종교의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역사를 포함한 인간과 삶의 모든 부분을 세속화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를 과거 행위자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속한 시대의 인식에 갇혀 이성과 계몽이라는 계몽주의의 열망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오류에 빠졌다. (2) 이탈리아의 사상가 비코에 의하면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고 경험했으며, 역사가는 과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정신세계를 재구축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보았던 것처럼 그들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역사를 신학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면 비코는 실제로 과거를 복원할 방법을 발견했다. (3) 19세기의 역사학은 세 갈래의 흐름으로 나뉜다. 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생겨난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역사서술(미슐레). ② 역사의 흐름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추상적 형태의 철학적 역사(헤르더, 칸트, 헤겔). ③ 역사의 의미나 목적에 대해 숙고하는 대신 기록된 사료에 대한 신중한 연구에 기초하여 실제 일어난 일(단지 실제로 어떠했는지 wie es eigentlich gewesen)을 탐구하는 전문적 역사학. 레오폴드 폰 랑케를 대표로 하는 역사주의자들은 원사료를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공정하고 편파적이지 않게 판단하며 과거 행위자들의 정신 세계에 공감하여 세계를 그들이 보았던 대로 보고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역사학을 근대적 학문분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역사철학 - 사변적 접근 인간은 고대 이래로 역사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 질문해 왔으며 대체적으로 세 가지의 결론 중 하나에 도달했다. (1) 순환적 관념은 많은 고대인들과 몇몇 동양 문화들 사이에서 발견되며 역사가 특별한 목적 없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고 주장한다. 종교사가 엘리아데는 <우주와 역사 -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고대인들의 순환적 세계관을 잘 분석했으며, 이 관점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이나 아놀드 토인비의 역작 <역사의 연구> 를 통해 알 수 있듯 20세기까지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었다. (2) 섭리적 관념은 역사가 정해진 목적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며 신의 인도가 역사의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5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집대성되어 중세의 역사 서술을 지배했으며, 역사를 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로 나눈 피오레의 요아킴이나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기전개과정으로 서술함으로서 일종의 신의론을 주장한 헤겔에게 영향을 주었다. (3) 진보적 관념은 역사가 특별한 목적을 향해 진행하는 과정이라는 섭리적 관념의 견해에 동의하나 신의 뜻이 아닌 자연 혹은 형이상학적 힘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 합리성과 계몽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주장한 볼테르, 역사를 자유의 확대과정으로 본 칸트, 사적 유물론을 통해 혁명과 공산사회 도래의 필연성을 강조한 마르크스가 이러한 입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철학 - 분석적 접근 ‘역사적 지식의 입증 가능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대립된 입장이 존재한다. (1) 실증주의자들은 모든 형태의 지식이 반드시 자연과학의 방법과 기법을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과학의 지위로 추락할 수밖에 수 없다고 단언했다. 즉 과거에 관한 보다 높은 수준의 일반적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과학적 모델과 수학적 정식화의 과정이 역사연구에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관념론자들은 자연과학에서 이끌어낸 유추는 유효하지 않으며 역사 서술에는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빌헬름 딜타이는 자연과학자가 자연 내의 규칙성과 균일성을 다룬다면 역사가는 독특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루며 자연과학의 목표가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인문과학의 목표는 특수한 사건에 대한 이해(verstehen)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국의 역사가 로빈 콜링우드는 역사란 인간 본성에 관한 학문이고 역사의 대상은 인간 정신의 활동이며 역사가의 주된 과업은 역사적 행위자의 사유를 파악하기 위해 그 행위 속으로 들어가 사유함으로서 정신이 했던 것을 이해하고 정신에 대해 배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의 전문적 역사학 최근의 역사학은 탐구의 경계를 남성 엘리트들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활동 너머로 확장하고, 사회과학이나 문화인류학, 언어학적 분석, 문예비평의 기법을 역사학에 적용함으로서 더욱 전문화되고 다양해졌다. 또한 여성이나 소수인종, 비서구 지역과 같은 주변부나 소수자의 역사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이 두드러졌다. 그 예로는 역사적 변혁의 동인으로 생산력이나 생산양식과 같은 경제적 요인을 강조하는 경제사, 익명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집단 정체성의 발전에 주목하는 사회사, 비서구 지역의 역사에도 서구와 동일한 정도의 관심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보편사,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역사적 행위자의 배후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동기에 주목하는 심리사 등이 있다.
그리고 경제적 요소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인간 행위를 형성하는 다양한 영향력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역설하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인간 정신의 집단적 심성과 역사적 변화의 기저에 존재하는 구조적 연속성(장기지속)에 주목하는 프랑스의 아날 학파, 수량화와 사회과학적 방법의 도입을 통해 사건들의 범주, 집합체 그리고 집단행위를 면밀히 검토함으로서 더 큰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미국의 신경제사, 마르크스의 영감을 받아 정치나 외교, 인종, 젠더와 같은 당대의 쟁점들을 역사적 연구를 통해 명확히 밝히려 했던 신좌파, 역사적 지식의 전문화와 파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통합적 개념화를 시도한 윌리엄 맥닐과 이마뉴얼 윌러스틴(세계체제론) 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된 이야기란 없으며 역사적 서술은 언제나 근본적으로 사건들에 대한 선택적 서사화라고 주장하면서, 역사적 서사는 픽션이며 과학보다는 문학과 상응하는 요소들이 더 많다고 강조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 이론가들은 역사의 본질에 대한 논란을 가속화시켰다. 오늘날 더 이상 모든 독자들의 정체성과 경험을 대변하는 공통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주의를 끌기 위해 경쟁하는 수많은 역사‘들’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각각의 역사‘들’은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을 적절히 대변하는 것이며, 우리는 새로운 통합에의 유혹에 굴복하는 대신 인류의 과거에 대해 말하는 다양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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