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우리 역사는 깊다』는 트위터를 통한 우리 정치 현실에 대한 촌철살인의 언급으로 유명한 역사학자 전우용이 일제 강점기였던 100여년 전과 현재가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살피기 위해 위생 관념의 확산이나 대중교통 수단의 도입, 전등 시대의 개막과 같이 주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작은 사건들을 소개한 후 그 의의에 대한 간략한 성찰을 덧붙인 글들을 모은 책이다. 저자는 “인간에게 본성이란 없다. 그에게는 오직 역사가 있을 뿐이다”라는 스페인의 역사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역사 속에서 스스로 만들고 변화시켜 왔으며, 따라서 “시간, 공간 및 인간의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변화의 과정”인 역사를 반추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인간다운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스스로 ‘나 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돌아보고, 현재의 선택이 우리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무겁게 받아들이게 되기를 희망한다.
2.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중세적 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던 한국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서구적인 의미의 ‘근대인’으로 바뀌게 되는가?” 또는 “주로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왜곡된 형태로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적 근대성’은 지난 100년간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바꿔왔으며, 오늘날 그 빛과 그림자는 과연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에 의하면 그 변화는 “중세적인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던 한국인들이 ‘서구적 근대성’이라는 미시적 ‘생체-권력’의 개입으로 기계문명과 자본주의적 생산에 적합한 ‘기계의 리듬’에 적응되어가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흥미롭게도 근대성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있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미시적인 ‘권력관계들(relations de pouvoir)' 에 주목했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통찰과 맥이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설하고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트위터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반짝임도 이 책이 주는 재미와 통찰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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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이전 - 경복궁 잔디밭과 일제의 공간정치 1926년 1월 7일, 남산 기슭에 있던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앞에 새로 지은 청사로 이전했다 ..... 조선 건축 기술의 정화를 담은 경복궁조차 총독부 신청사의 위용에 비하면 하찮게 여겨지리라는 것, 그리하여 조선인들 스스로 자기들의 문명적 성취라는 것이 얼마나 볼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리라는 것. 일제가 총독부 신청사 장소를 경복궁 앞, 정확히는 경복궁 궁내로 정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이 점을 노린 조치였다. 원주민의 것을 야만의 위치에, 식민지 지배자의 것을 문명의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원주민들의 잠재의식 안에 모멸감을 심어주고 감사와 동경의 눈으로 제국주의를 대하게 하려는 상투적인 ‘공간정치’ 기법이었다. 식민지 도시 공간은 문명과 야만, 선진과 후진의 표상들이 시각적으로 대비되고, 식민지 원주민들 스스로 버려야 할 것과 새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장치였다.
조선총독부, 한센병 환자 격리위해 소록도 자혜의원 설치 - 한센병보다 무서운 병, 장애인 혐오증 (근대로 접어들면서) 지식과 결합한 권력이 ‘비정상’으로 규정한 존재들을 격리하는 행위가 일반화하자,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와 같은 ‘비정상인’이 주변에 없는 것을 ‘정상 상태’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섬 안이나 높은 담장 건너편으로 격리되어 ‘정상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미지의 존재’이자 ‘신비화한 존재’로 변모한다. 더불어 ‘정상인’들의 그들에 대한 오해와 공포도 깊어진다 ..... 병에 걸리거나 다치지 않고 평생 사는 사람은 없다. 장애는 조금 두드러지는 질병과 부상의 흔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기 동네에 장애인시설이 들어온다고 집단 시위를 벌이고, 장애인들이 만든 빵은 절대 사먹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전염되지 않는 한센병보다 전염성 높은 ‘장애인 혐오증’이 훨씬 더 큰 문제다.
조선체육회 창립 - ‘수신(修身)’ 버리고 ‘체육’ 만으로 얻는 몸은 사람의 몸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 다리가 길면 일부러 보폭을 줄이고 자기 다리가 짧으면 억지로 보폭을 늘리는 훈련을 반복해온 사람들이다. 개인의 몸에서 개성을 지우고 그 자리에 집체성을 새겨 넣는 것이 현대 체육교육의 중심 목표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집체적 동작의 기준 리듬은 평균적 인간의 평균적 동작을 감안해 만든 기계의 리듬이다. 산업혁명으로 기계문명의 시대가 열린 다음에야, 기계가 흔해지고 대다수 사람이 기계에 익숙해진 다음에야, 사람들은 기계의 규칙성과 정확성에 자기 몸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야, 기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투입될 수 있었다. 그 재구성 과정을 담당한 것이 체육교육이었으며, 그것은 공장노동과 군대 복무에 유용한 균질적인 몸을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삶에서 체육의 비중은 나날이 늘어나는 반면, 修身(내면의 도덕률에 따라 행동거지를 가다듬는 것)의 비중은 그에 반비례해서 줄어들고 있다. 부처가 수년간 ‘고행’을 한 것은 뭇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였으며, 예수가 40일간 광야를 헤매며 ‘단식’을 한 것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기 한 몸을 가꾸기 위해 고행과 단식을 한다 ...... 70억 인간 중에서 가장 빠르다는 우사인 볼트도 가장 느린 치타보다도 느리다. ‘수신’을 버리고 ‘체육’만으로 얻게 되는 몸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몸이다.
자동차취체규칙 제정 -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자동차, 새 가족을 얻은 대신 잃은 것들 자동차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편익을 제공했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스트레스와 위험을 그 대가로 요구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현대의 도로는 사람이 사색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언제나 긴장한 상태로 걸어야 하는 길이다. 자동차가 도로를 점령한 후로, 대다수 가정의 아침 인사는 “차 조심해라”가 되었다 ..... 자동차는 도로의 형태와 이용방식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태도와 방식, 나아가 세계관과 역사관까지 전면적으로 바꿨다. 그것은 사람을 ‘중세’에서 ‘근대’로 옮겨놓는 타임머신 구실을 했다. 의자에 앉아 차창 바깥의 세상이 움직이는 광경을 거듭 쳐다보면서, 사람들은 세상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전 시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감각, 전혀 다른 의식을 키워나갔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세상은 움직인다는 생각, 돈만 있으면 고생하지 않고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식. 이런 감각이 현대인들의 세계관과 역사관 일부를 구성한다 .... 옛날의 ‘말’ 이 친구이자 식구였던 것과 비슷하게, 현대의 자동차는 또 하나의 ‘가족’이거나 ‘자기’다. 자기 아내가 요리하다가 손가락을 베이면 밴드나 붙이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면서도 자기 자동차에 살짝 흠이라도 나면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인간보다는 기계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이고, 새 친구 사귀는 것보다는 새 기계 장만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 현대인을 만드는 데 자동차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없을 것이다.
양화진에 외국인 묘역 조성 - 글로벌시대, 한국인의 사생관과 외국인 묘지 한국 전통문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삶과 죽음을 지나칠 정도로 멀리 떼어놓는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 도시를 가나 도시 한복판, 마을 한 귀퉁이, 산 사람의 집들 옆에 공동묘지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자기 삶의 공간 주변에 무덤은커녕 그 비슷한 시설이 있는 것조차 참지 못한다. 오랫동안 산 자의 거소와 죽은 자의 유택을 공간적으로 확실히 분리시키는 문화 속에서 살아온 탓에, 현대 한국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소멸시킬 것처럼 행동한다 ..... 출퇴근길이나 통학길에 수시로 무덤을 보는 사람들과 자신의 일상생활 공간에서 죽음을 멀리 떼어놓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삶을 대하는 태도다.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회는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삶의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못하면서 표피적이고 말초적인 자극에만 몰입하는 현대 한국인 다수의 행태는, 어쩌면 죽음을 접할 기회가 줄어든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서소문 화교들의 삶 - ‘외국인 혐오증’, 우리가 용납될 공간도 줄인다 세계화란 우리가 세계로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도 의미한다. 그런데 1960〜70년대 군인으로, 광부로, 간호사로 건설 노동자로 베트남,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 나갔던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회를 빈곤의 늪에서 구출해낸 산업 역군이라는 찬사를 바치면서도, 이 땅에 들어와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멸시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외국인이 범죄라도 저지를 양이면 마치 외국인의 DNA에 범죄적 기질이 포함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반응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이때의 ‘외국인’에서 미국인이나 유럽인은 대체로 배제된다. 일제 강점기 외국인 혐오가 일본인을 배제한 채 중국인에게만 향했던 것처럼 ..... 한국 근현대의 ‘외국인 혐오증’은 민족주의의 소산이 아니라 비루한 ‘민족 서열의식’의 소산이다. 이런 의식과 태도에 대한 세계인의 ‘보답’이 어떤 것일지는 불문가지다. 우리 안에 들어온 세계를 끌어안지 못하면, 우리가 용납될 세상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성전기회사, 전등개설예식 개최 - ‘불야성’을 현실 세계에 구현한 전등, 그래도 늘 부족한 현대인의 시간 전등이 발명되지 전까지, 밤은 귀신이나 도깨비 혹은 악령이 지배하는 시간대였다. 밤은 인간의 행동 공간과 행위 내용을 제약했다. 또 계절에 따라 낮과 밤의 길이가 달랐기 때문에 인간 삶의 리듬은 자연의 운행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등은 전설의 ‘不夜城’을 현실 세계에 구현함으로서 인류로 하여금 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전등은 양과 음, 천사와 악마의 시간대로 나뉘어 있던 낮과 밤의 구분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전등으로 말미암아 낮과 밤은 연속된 시간대로 통합되었으며, 서로 밀도가 달랐던 시간들이 균질화되었다. 인류가 ‘규칙적인 생활’을 모범이자 정상으로 상정할 수 있게 된 것도, 한밤중에 아무 두려움 없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전등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들이 며칠씩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하고 야근에 시달리게 된 것도 전등 때문이다. 옛날 노예들은 밤에는 그래도 잠을 잘 수 있었으나, 현대의 임금 노동자들은 한밤중이라도 자본가들이 시키는 대로 군소리 없이 일해야 한다. 전등은 자연이 인간의 일상에 가하던 원초적 제약을 무력화함으로서 인간 내면에서 자연성을 소거하는데 성공했다. 인간을 기계처럼 만드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이 바로 전등이다 ..... 이제 귀신이 지배하는 시간 악령을 두려워해야 하는 시간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언제나 ‘시간이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정말 그렇게 시간이 없는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은, ‘불빛’을 자기 내면으로 향할 때에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요즘 사람들에게 제일 부족한 것은 ‘모든 시간’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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