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최근에 인상깊게 읽었던 책 중의 하나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로 잘 알려진 복음주의 역사학자 마크 A. 놀의 지적 자서전인 <나는 왜 세계기독교인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책은 최근 세계 기독교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 남반구 기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기획된 '남쪽을 향하여 Turning South'라는 시리즈 중 한 권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모든 교회적 ‧ 신학적 ‧ 도덕적 범주는 역사적이고 상황적이지만 동시에 참다운 기독교 진리에 온전히 참여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역사는 모든 시대의 족속과 민족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기독교”의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욱 “세계기독교”이며, 전통적인 서구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기독교의 유일한 ‘규범적’ 혹은 ‘표준적’인 모델로 간주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조엘 카펜터라는 분이 쓴 이 시리즈의 짤막한 서문이었습니다. 이 글이 제가 한때 깊이 경도되었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발흥이나 전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시사점들을 던져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글쓴이는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에서 남반구와 아시아 쪽으로 기울어가는 것을 포함한 “기독교 인구, 활력, 영향에서의 세계적인 변동은 북대서양 지역의 기독교 학자들을 경악”시켰으며, “그들의 사명감과 방향감각은 점차 탈기독교화 되어가는 서구의 문제들을 지향하게 되었고, 그것을 다루기 위한 그들의 준비도 유럽의 ‘기독교 인문주의’ 전통 내에서 구성”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C.S.루이스, 아브라함 카이퍼, 도로시 세이어스가 그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그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교양 있는 종교 경멸자들’로부터 지적 영역을 회복하는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들의 전략과 집착이 “유럽 기독교 세계라는 모루”위에서만 연마되다보니, “선교의 최전선에서 기독교적인 열정과 참여는 학문 작품을 생산하기 위한 기독교 자원과 심각하게 불일치하게 되었다” 고 글쓴이는 강조합니다
제가 과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요 저자들이나 요즘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인기 있는 몇몇 영미권 저자들의 책을 접할 때 가끔 ‘정작 가려운 내 다리는 놔두고 남의 다리를 시원하게 긁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좋은 분석인 것 같습니다. 단 한번도 기독교 문명권(Christendom)에 속해본 적이 없고, 기독교가 국민들의 종교성 심층에 자리잡지 못했으며, 아직 전 인구의 80%가 비기독교인인 다원적이고 다종교적인 사회인 한국의 상황에서, “북대서양 지역의 기독교 인문주의” 전통에 근거한 “세속화되고 타락한 세상에서 답이 되는 기독교로 다시 돌아가자”라는 식의 접근이, 소수의 ‘기독교 덕후’들을 제외한 일반 그리스도인들이나 비기독교인들에게 과연 의미 있는 의사소통의 방식이 될 수 있을까요? 이제는 혹시 우리가 이 책의 저자인 마크 놀이나 위대한 선교사였던 레슬리 뉴비긴과 같은 선구자들의 뒤를 따라 ‘기독교 세계’의 미몽에서 벗어나 ‘다원화된 세계에서의 복음’에 대해 고민하며 “세계기독교”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용감하게 발걸음을 디뎌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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