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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 하는가? (제임스 스미스 지음, 살림 펴념)

by 서음인 2016. 5. 30.

1.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자, 세속적 인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칼빈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우리 신앙의 근저에 깔려 있는 ‘근대성’의 전제인 자율성과 개인주의야말로 복음을 거스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데리다나 리오타르푸코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가르침에서 이러한 근대성 비판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플라톤을, 아퀴나스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하여 기독교의 지혜를 보여 주었다면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게서 ‘근대적’ 기독교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지혜를 얻지 못할 이유는 없다.

2. 저자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유명한 구호는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은 항상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언어라는 렌즈를 통과하지 않은 순수하고 투박한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대로 만일 모든 경험은 항상 해석이며 이 세계 전체는 해석을 요구하는 텍스트라면 우리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사실에서 해석으로가 아닌) ‘해석에서 해석으로’ 움직이는 것이며, (해석을 요구하는 세계라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데리다의 주장은 진리란 객관적이어야 하며 만약 복음이 해석이라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근대적 기독교의 진리관과 어긋난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지식개념은 중립적 이성이 진술하는 진리의 체계는 신앙이 아니며 신앙은 ‘들을 귀와 볼 눈’ 을 필요로 한다는 신약성서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객관성이라는 근대성의 신화에 집착하는 대신 데리다를 따라 “성경 바깥에 아무 것도 없다” 고 말함으로서 우리가 성경이라는 특정한 해석틀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해야 하며, 이렇게 기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해석한 사실을 사상의 시장에서 검증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또한 이러한 해체적 관점은 주변으로 밀려난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강요당한 정의의 목소리를 소생시킴으로서 선지자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3. 저자에 의하면 리오타르(Jean François Lyotard, 1924-1998) 가 말하는 메타내러티브란 단순히 세상의 기원과 목적에 관한 ‘큰 이야기’ 가 아니라 보편적 이성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과학적 지식)이며, 리오타르는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비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라는 자신의 구호를 통해 서사지식을 극복했다고 믿는 과학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의 근거가 서사임을 폭로함으로서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 과 ‘입증가능성’이라는 근대적 가설에 대하여 탈근대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를 보편적 이성으로 입증 가능한 진리와 사상의 체계(메타내러티브)로 간주하는 근대적 기독교 이해에 반대하여, 저자는 리오타르를 따라 기독교의 계시는 그 본질상 이야기(서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계시가 이야기의 형태로 주어진 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적 과제가 명제적 진리에 대한 입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 속에 참여하여 세상을 향해 복음의 이야기를 살아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강조한다.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탈근대적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만찬을 포함한 의식들을 기념하며 복음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들어야 한다.

4.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는 “모든 권력은 지식이다”라는 그의 도발적인 구호를 통해 근대 사회의 기반에는 그물망 같은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권력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지식체계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권력은 개인을 국가와 자본주의에 속한 유순하고 유용한 주체로 만들기 위해 ‘시선’ 과 ‘훈육’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통제하고 있으며, 감옥이야말로 이러한 근대사회의 특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고 강조한다. 결국 푸코에 의하면 근대사회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훈육을 통한 통제와 형성이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다는 푸코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지만 모든 훈육과 형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생각에 대해서는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주류 권력의 억압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훈육에 반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고아와 이방인을 돌보는 사람을 만드는 대안적 방법, 대안적 훈육을 시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포스트모던 교회는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며, 전통적인 교회의 훈육방법인 영성훈련의 전통을 활용해야 한다.

5. 제임스 스미스는 이머징 교회를 주장하는 개척자들이 교회의 영역에 이와 같은 탈근대성의 가치를 용감하게 도입하고 근대 교회의 종교성을 비판하며 ‘종교 없는 기독교’를 추구했지만 그들의 주장 역시 여전히 ‘실용주의적 복음주의’ 라는 근대주의자의 전략에 갇혀 있다고 주장하면서 가장 포스트모던한 교회는 가장 고백적인 교회이고, 탈근대세계로 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전통의 회복이며, 제자도를 기르는 가장 효과적 수단은 예전(ritual)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그의 결론을 급진정통(radical orthodoxy) 이라고 부른다.

(1) 급진정통 교회는 입증될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카르트적 오류를 거부하지만, 계시라는 은총에서 나오는 지식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신 하나님을 안다고 세상을 향해 고백할 수 있다. 또한 급진정통 교회는 모든 유한성이나 특수성을 폭력으로 규정하는 데리다의 주장과 달리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와 교회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유한성과 특수성이야말로 선하다는 성육신의 논리를 옹호해야 하며 이러한 특수성에 근거하여 우리의 고백과 실천을 비변증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이미 존재하는 문화의 어법으로 번역하거나 문화적 어법과 복음의 상관성을 찾으려 하는 ‘상관관계의 신학’에 반대하여 우선적으로 상황이 아닌 계시와 기독교 전통에서 교회의 본질과 실천을 찾아야 한다.

(2) 자유주의 교회의 無역사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의 원시주의(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는 풍요한 기독교 역사의 유산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급진정통 교회는 성육신을 긍정하며 그것은 교회 제도와 실천을 포함한 인간의 문화적 창조물도 성령의 활동과 계시의 결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급진정통 교회는 시간의 열매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몇몇 고대교회의 의식들과 예전들을 회복하고, ‘관대한 정통’과 ‘건강한 가톨릭 정신’을 지닌 초국적이고 관용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성육신을 진지하게 긍정한다는 것은 전체 물질 영역이 계시를 반영할 수 있는 잠재력을 인정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기에 급진정통 교회는 (듣기, 보기, 만지기, 맛보기, 냄새 맡기와 같이) 그들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예전적 예배의 통전적이고 온전한 물질성을 회복해야 하며, 이야기뿐 아니라 포도주와 성상(icon), 이미지와 춤으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6.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의 적이며 ‘파리에서 온 사탄’ 인가? 과연 이머징 교회는 불건전한 신비주의 운동이며 위험한 혼합주의적 신앙인가? 이 책은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자신있게 대답하기 전에 바로 그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 함께 우리의 신앙이 서 있는 ‘근대성’ 이라는 토대가 과연 기독교를 위한 적실한 기초인지 고민해 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의 풍요로운 유산이라는 빛으로 우리의 ‘근대적’이고 편협한 신앙을 조명해 보라고 권유한다. 우리가 그러한 과정을 통해 “타성 속에 굳어진 편견을 굽어볼 수 있는 메타적 시선을 획득하고....자기 생각의 순환 속에서 굳어지는 공부의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면...(김영민)” 그때도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선뜻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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