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위가 몰려오는 데 며칠 전부터 에어컨이 멈춰 섰다. 선풍기 한 대를 놓고 한여름과 씨름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안과의사 정한욱 집사가 딸과의 대화 형식으로 쓴 신앙에세이집을 우리 은퇴 목사 7월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했기 때문이다. 책을 받은 지는 꽤 되었는데 그간 써야 할 글과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을 적어 본다.
2.
이 책에서 선택된 논의된 여러 가지 질문은 오늘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의 내면에서 제기되는 것들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보수적인 목사 밑에서 신앙 생활하는 이들의 내적 갈등의 요인이다. 성서문자주의를 벗어난 해석의 다양성, 본회퍼의 성숙한 시대(come of age) 개념과 요술방망이를 든 하나님(deus ex machina)없는 신앙, 기독교 세계관의 비과학적 비교제적 오두막을 벗어난 글로벌한 세계종교 중의 하나인 기독교 인식, 윤리적 감시자인 익명의 하나님, 제 3의 신앙의 눈, 남성적 권력이 된 하나님의 폭력성, 오만과 탐욕이라는 행위의 죄에 더하여 태만(sin of ommission)의 죄, 그레코로마 세계의 “명예와 수치” 윤리에 비견할 일본의 수치문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공감(empathy), 진실을 대면할 용기, 성서 내러티브 속에 담긴 편견의 유통,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순종의 도구화, 정의롭지 않은 평화, 종교 간의 대화와 평화, 환대의 윤리, 칼빈주의의 배타성, 기독교와 유교의 가부장성에 코팅된 교회....
저자가 선택한 많은 질문들은 특히 보수적인 신앙에 동의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여성 안수를 거부하는 정도의 보수적인 교회에 출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가. 그의 질문에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다소 누락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책 한 권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으나,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가장 심각한 논란을 거친 몇 가지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저자가 의사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자살, 사형제도, 안락사, 혹은 동성애(펜데믹을 논하며 일부 언급하고 있으나), 그리고 진화론, 혹은 근 10년 넘게 한국교회가 반대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묻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여성안수를 거부하는 교회에서 평생을 신앙생활 했다면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저자가 동의하거나 부정한다 할지라도 속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3.
근본주의 신앙이 견지하려는 성서주의적 신앙은 교회의 권위 앞에서 신자가 이성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성의 포기는 초역사적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승인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그래서 이성적 질문은 신앙과 교회 권위의 파괴행위가 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 패턴에서 벗어나 보수적인 교회의 신자가 제기하는 이성적인 질문에 대하여 보수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고 이성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이 제기하고 답하는 문제가 대부분 보수일색인 기독교 신자들의 동의를 충분히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반복해 언급하고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신앙의 길을 걷기가 힘들다. 매우 슬픈 일이다.
많은 질문이 결국 교회가 주장하는 하나님, 성서, 예수의 사실증명을 요구하거나 가르침의 권위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무수한 질문이 나온다. 하나님의 계시로서 성서의 권위, 하나님의 역사 개입 문제, 전능하신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고 계시는 것일까? 순종을 요구하고 여성 안수를 부정하는 행태의 근거가 성서라니 왜 그런가? 왜 세상에는 가난한 이들이 여전히 있는가? 이런 내면의 물음을 제기하는 흐름은 다소 신정론(Theocracy)과 신의 정의 문제(Theodicy)에 관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자연 재해의 악과 사회의 구조적 악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소환하게 된다. 사랑의 하나님이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냐고 묻게 된다. 홀로코스트만이 아니라, 세월호, 이태원을 겪은 세대는 계속 전능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이들에게 물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正義)로움을 입증하라는 요구는 사실 교회의 자승자박 모순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가르쳤으니 그 하나님은 요술방망이(deus ex machina)의 하나님으로 우리의 모든 불행과 고통을 막아주는 신화적 존재로서 기능한다. 그러다보니 악의 문제까지고 신의 섭리가 숨어있는 것이라고 합리화하던 신학적 흐름은 오늘날 힘을 잃었다. 하나님은 탐욕적이며 실용적 가치를 찾는 이의 수단이 아닌데도 수단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하나님을 내세우며 인간을 차별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는 교리를 신봉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사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속화신학 논쟁 이후 신학적 윤리의 주제가 되지 못한다.
기독교는 오랜 동안 하나님을 권력화하여 스스로를 이해했고, 선교했고, 정복자 노릇을 했다. 여기에는 신학과 제국주의의 야합, 신학 안에서의 유럽(서구)중심주의와 문화사대주의의 오만 등 - 이런 주제들와 관련하여 작동하는 보수교회의 증오의 신학은 진리를 독점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보수 기독교의 산물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사실 무능했다. 16세기 페스트도, 홀로코스트도, 2020년 펜데믹도 막지 못한다. 현세에는 무능하다가 내세에 심판자로 권위를 되찾는 그런 하나님으로 이해되던 신화적 이해는 사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상당부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은 이를 악물고 자유주의 신학을 미워한다.
4.
기독교 세계의 제국주의적인 습성에서 자란 덧니 같은 것이 우주론적, 절대 전능한 하나님으로 표명되었으나 그 하나님은 사실 유럽사회에서 거의 발치되었다. 나는 지배자 표상으로 이해되는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DNA 검사를 해보면 부자지간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하나님에게 묻던 책임을 이제 인간의 책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승승장구 승리만 거둘 수 있을까? 아니다. 모든 불행과 고통을 인간이 다 책임질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고난당하는 이들 곁에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을 논증하는 목사들의 주장은 허언과 과시를 일삼는 우물안의 괴물들이다. 이들은 모든 우연을 하나님의 개입이라 여기고, 하나님을 침묵을 거룩한 침묵이라고 오도한다.
호전적이고, 배타적이고, 정죄적이며, 오만무도한 기독교를 자랑하는 보수 목사의 허공 치는 설교는 예수를 지배자로 삼고, 지배자 예수를 대신하여 지배하는 목사가 왕노릇 하는 교회지상주의의 산물, 그릇된 편견이다. 종교전쟁, 종교재판, 선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문화제국주의, 그리고 지금도 수십 가지 헌금 항목을 만들어 신자를 착취하는 교회는 예수에게서 거리가 멀다. 예수는 그런 것을 가르치신 적이 없다. 해방과 자유를 귀하게 여기고 차이와 차별을 핑계로 인간 억압을 거부한 에라스무스를 생각하고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사귐이 일어나는 레비나스의 환대의 윤리를 따르겠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교인을 숫자로 셈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경쟁적으로 헌금을 하게 헌금자를 호명하는 교회는 너무나 천박한 것이 아닐까?
저자의 딸은 목사님의 말씀에서 늘 회의적인 의문과 의혹을 얻는다. 대화와 사유 없이 무조건 “아멘”을 외치는 신자가 될 수 없어서 난감한 딸이다. 요즘, 교회는 성숙한 지성인의 공동체가 아니라 성인 유치원으로 전락하여 여성들을 불러내 집단 유희까지 시키고, 찬양으로 자기도취에 빠지게 만들어 “역사적 현장“에서 거리가 먼 은혜의 게토가 되고 있다. 은혜를 나누기 위해 뺑뺑이 돌리듯 신자가 숨을 못 쉴 정도로 프로그램을 돌리는 목사들의 숨은 의도는 “사유하지 않고 순종하는 신자 만들기 작업”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아예 “이성과 지성을 가진 이들은 교회 오지 마“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 과연 해방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을까? 여성 안수를 거부하는 교회에서 여성이 온전한 인간으로 자기 이해를 가질 수 있을까? 거기서 모험적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 저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5.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에게서 기독교 지성인들이 보이는 흔한 상투적 태도를 느끼지 않았다. 기독교인은 지성인일수록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하면 체면이 안 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부분 원만하게 처신한다. 갈등은 불러올 일을 피하는 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쟁적으로 교회 일에 충성한다. 마치 교회 생활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교회에서 얽힌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교회에서 사귄 공동 관계망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한다. 간혹 유치하고, 권위주의적이고, 비윤리적인, 시대착오적인 문제, 비이성적인 문제를 직면해도 그런 것들을 시정하려 하지 않는다. 복종과 순종의 덕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특징 중 대부분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읽은 책 리스트에 소위 복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쓴 책이 균형 있게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쉬운 것은 여성해방주의자들의 저작은 있어도 1970년대 이후의 해방신학에 관련한 저서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저자의 독서는 20세기까지 제기된 신학적 논의들을 커버할 수 있는 정도로 광범위했다. 어지간한 목사들은 읽지 않았을 책들이 즐비하다. 맥페이크, 피오렌자를 읽은 목사가 몇이나 될까? 의사라는 전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며 독서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었을 것인데 다소 놀라웠다. 하지만 자유주위 신학을 넘어 해방신학을 넘어, 현대 신학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교회가 인간의 해방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신학을 공부한 이들의 이익 집단인지 묻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과연 진리를 마주할 용기를 가진 신자를 키우는 곳인지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는 과거에 만들어진 진리를 고수할 뿐 새로운 진리를 마주하게 신자들을 돕지 않는다. ,
6.
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마지막 챕터에서 비록 물속에 발만 담그는 학과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가진 배움의 자세를 말하고 있지만, 그 역시 진보와 자유주의 신학에 발만 담그고 있다는 인상이 남았다. 저자는 오늘의 교회가 개혁되어 내일의 교회는 보다 열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저자는 “그런 교회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시기나 할까? 내가 살아갈 미래의 세상에서라도 부디 교회가 마음을 들이켜 증오와 혐오가 아닌 사랑과 환대를 앞장서서 전파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야(230).” 마치 광야를 지나온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그의 무리가 들어갈 것을 소망하고 멈추어 선 것과 같이 느껴졌다. 왜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지 못하고, 딸에게는 가나안의 삶이 주어질 것이라고 소망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가 계속 보수적인 신앙 환경에서 머무는 이유일 것이다. 평생 걸어온 신앙의 길을 떠나기는 두려울 것이다. 아니 딸을 위해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진솔한 책을 쓸 수 있는 저자는 내게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명박, 황교안, 김기현도 다 장로인데, 정한욱 집사는 여전히 집사다. 근 20년 전 크리스쳔 아카데미에서 신세대에 대한 토론을 위해 내가 발제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느 목사님은 교회의 젊은이들을 두 부류로 분류하여 교회의 젊은이들의 형편을 말했다. “어지간한 교회에서는 옛날 내가 젊었을 때처럼 젊은 이가 몰려다니는 것을 볼 수가 없어요. 젊은이들을 찾기 너무 어려워요. 몇 안 되는 이들을 살펴보면 두 부류로 나뉘어요. 한 편은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는 철없는 은혜놀이에 열중하는 애들이구요, 다른 한 편은 순교하듯 교회에 끌려 나오는 애들이예요.” 순교라니, 엉뚱한 표현에 함께 웃었지만, 공연히 목사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기억을 소환하는 이유는 보수적인 교회는 오늘의 지성인을 십자가에 매달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써서 보내주신 정한욱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목사들의 모임에서 나눌 이야기를 쓰다보니 다소 까다로운 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심 반가운 마음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런 신앙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하다. 참된 성서적 교회가 무엇일까를 평생 생각하며 진리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장기려의 길을 잠시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 (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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