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체주의의 기원』은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정치사상가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의 처녀작이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공부했으며 2차 세계 대전당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녀는 이 책에서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었던 ‘절대악’으로서의 정치체계인 “전체주의” - 즉 히틀러의 나치즘과 스탈린의 공포정치 - 의 기원과 특징에 대해 상세히 분석한다.
3부로 나누어진 이 방대한 책에서 1부 반유대주의와 2부 제국주의는 이 책의 핵심인 3부 전체주의를 위한 서론 격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전체주의의 도래를 위한 길을 닦았다” 라는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칼 야스퍼스의 말처럼 길고 이해가 어려운 1, 2부보다는 핵심에 해당하는 3부를 먼저 읽는 것이 이 책을 읽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리뷰 역시 3부인 전체주의에 집중하기로 한다.
2. 전체주의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운동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운동으로서의 특성을 유지할 동안에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전체주의 운동에서는 운동만 지속될 뿐 궁극적으로 지도자도 대중도 독립적 인격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운동의 핵심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지지자를 끌어들여 조직하고 그들을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체주의 정권은 개성을 가지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획일화되고 고립된 군중 혹은 잉여 존재로 만드는 정치적 도구와 장치를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3. 근대 국민국가의 몰락과 계급사회의 붕괴과정을 통해 어떠한 계급이나 정당 혹은 공동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잉여집단인 ‘폭민’이 발생했다. 체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지 못한 모든 계급의 폐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있으며 절망과 증오로 가득 찬 채 자신들을 조직하여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할 지도자를 기다린다. 이러한 폭민의 존재야말로 전체주의 발생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체주의는 간단히 말해 폭민의 운동 · 조직 · 정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전체주의 운동은 폭민에게 정체성과 목표를 부여하고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줌으로서 거대한 운동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희생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기존 사회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전체주의 운동의 총체적 비전에 매혹된 엘리트들과도 동맹을 체결한다(폭민과 엘리트의 동맹).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 전체주의는 폭민의 폭력적 창의성이야말로 엘리트의 지적 창의성과 함께 전체주의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요소라는 사실과, 폭민보다는 획일화된 속물 대중이 지배와 말살의 가혹한 통치를 위해 더 나은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나치 정권하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역들은 아이히만과 같이 개인의 사적 안녕을 보호하는 데만 골몰하던 속물화한 부르주아 계급이었으며, 지적 능력과 창조성의 부족이야말로 전체주의 정권이 요구하는 충성심의 가장 중요한 보증이 되었다.
5. 폭민과 엘리트는 전제주의 운동 자체의 힘에 의해 끌릴 수 있으나 대중은 선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자연과 역사의 법칙에 대한 배타적이고 과학적인 예언”의 형태가 전체주의 선전의 특징이며, 전체주의 운동은 이러한 예언(선전)의 오류 불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테러(무법적 폭력)을 이용한다. 전체주의 운동에서 테러는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화된 교의와 실천적 거짓말을 끊임없이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따라서 전체주의가 정권을 장악한 후 선전은 교화로 대체되지만 테러는 권력 장악 이후에도 지속된다. 선전이 非전체주의 세계를 다루기 위해 전체주의가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면, 테러는 전체주의 지배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나치가 이용했던 가장 핵심적이고 효과적인 선전은 ‘유대인의 세계음모’라는 허구였으며, ‘유대인 의정서’ 같은 가짜 문서를 통해 유포된 유대인의 세계통치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짓을 유대인 말살과 독일의 세계지배를 위한 토대로 삼았다.
6. 전체주의 조직은 전체주의 운동의 선전용 거짓말들을 현실로 전환시키고 구성원들이 허구세계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전체주의의 조직은 다수의 동조자와 엄격히 선발되는 소수의 당원으로 이루어지며, 동조자 조직은 전체주의 운동을 정상적이고 점잖은 외양으로 둘러싸 외부세계에 대해 일종의 완충장치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조직은 계속해서 더 높은 엘리트 조직을 만들면서 이전 조직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무한히 반복된다. 동조자와 당원에게는 각각 지도자의 모든 발언과 이데올로기적 선전을 믿을 것이 기대되었으나, 운동의 최상위 엘리트 집단에게 요구된 유일한 자질은 지도자의 모든 ‘사실적 진술’을 즉각 현실 속에서 실현시켜야 할 ‘목적의 선언’으로 알아듣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7. 정권을 장악한 전체주의는 전제정권의 형태로 경직됨으로서 운동성을 상실할 위험(절대주의)과 운동의 이동이 국경 내에 제한될 위험(민족주의)에 직면했으며, 스탈린 정권은 영구적으로 제도화된 숙청을 통해 나치는 끊임없이 강화되는 인종선택과 말살을 통해 운동의 내부적 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집행자이자 후견인으로 비밀경찰을 구축하고 절대적인 지배를 구현하는 실험실로서 강제 수용소를 세웠다.
(1) 전체주의 국가기관의 특징은 관직의 중복과 권위의 분할, 실질적인 권력과 표면상의 권력의 공존이다. 기능이 중복되고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며 어디에 실권이 있는지 불확실한 각 관청들 간의 부단한 경쟁은 반대나 사보타주를 성공적으로 차단하고, 중간 단계 없이 모든 조직이 지도자의 의지를 직접 구현할수 있도록 해주였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중복의 부작용인 관료체제의 거대화는 숙청을 통한 반복된 청산 작업으로 억제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은 권력 유지를 위한 통치 기술로서는 탁월했으나 행정의 책임감과 전문성, 효율성이라는 면에서는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2) 전체주의 국가에서 모든 실권은 공식적인 국가 및 군대 기구의 밖에 있는 운동의 제도에 있었으며, 그 핵심에는 유능하고 능률적인 실질적 권력기관인 비밀경찰이 존재했다. 일반적인 전제 권력하의 비밀경찰이 정권에 반대하는 ‘범죄 용의자’를 추적한다면, 전체주의 국가의 비밀경찰은 구체적 범법 여부와 상관없이 권력이 자의적으로 운동의 장애물로 규정한 ‘객관적인 적’ - 예를 들면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 - 을 제거하기 위해 활동한다. 전체주의 정권이 정권을 장악한 후 실질적인 적들의 제거 작업이 완성되고 ‘객관적인 적’에 대한 추적이 시작되면 비로소 비밀경찰을 통한 공포정치가 전체주의 정권의 실질적인 내용이 된다.
(3) 인간 행동의 표현인 자발성 자체를 제거하고 인격을 단순한 사물로 격하시켰던 전체주의 정권의 강제 수용소나 집단학살 수용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의 기본 신앙을 실증하기 위한 무서운 실험실이자 인류역사에 전대미문의 ‘극단적 악’이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에서 철저히 삭제된 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졌으며, 법적 인격과 도덕적 인격 그리고 자발성과 개성이 철저히 파괴된 채 사물 혹은 ‘반응의 묶음’으로 ‘개조’되었다. 집단 수용소야말로 모든 사람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하게 지배하기를 원했던 전체주의 권력의 목적이 가장 잘 구현된 ‘모범적 사회’였으며, 그 절대악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공포와 침묵 그리고 열광을 통해 전체주의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제도가 되었다.
8. 이렇듯 전체주의 정권은 다양한 인간들을 내면에서부터 지배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거리를 제거하여 ‘사고’하거나 ‘행동’하는 존재가 아닌 ‘순종’하거나 ‘반응’하는 존재로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개개인들에게 총체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이고 변치 않는 충성을 요구한다. 개인들은 다원성을 잃고 획일화되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 대중이 한 의견을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동일하게 행동할 때, 그들은 전체주의의 폭민이 된다.
9. 아렌트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잉여’ 혹은 ‘폐물’로 전락한 절망과 증오로 가득 찬 일군의 대중인 폭민(mob)의 존재가 전체주의 발생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민들의 정권인 전체주의가 가장 선호하는 통치 대상은 자신과 가족의 안녕에만 관심이 있는 고립되고 생각 없는 대중이었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나치가 저지른 ‘절대악’ 의 대부분은 바로 아이히만과 같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던 소시민 대중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구하지 못하거나 비정규직으로 만족해야 하는 사회, 일상화된 해고나 조기퇴직으로 인해 언제든지 자본주의 체제의 ‘잉여’로 밀려날 위험에 처해 있는 사회, 그리고 타인과의 연대를 상실하고 타인의 고통에 눈감은 채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는 성실하고 고립된 개인들로 가득 찬 사회,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체주의나 그와 유사한 ‘절대악’으로 규정될 수 있는 정치체제의 위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렌트의 말마따나 자유나 평등이란 인간들이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공동체에 부과하는 것이며, ‘연대’와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권력과 지도자의 선전에 대해 ‘고립된 조건반사들의 다발’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는 스스로 선택한 ‘절대악’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이미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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