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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새로운 존재 (폴 틸리히 지음, 김광남 옮김, 뉴라이프 펴냄), 영원한 지금 (폴 틸리히 지음, 김광남 옮김, 뉴라이프 펴냄), 폴 틸리히 - 경계선상의 신학자 (박 만 지음, 살림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1.『새로운 존재』『영원한 지금』은 칼 바르트와 함께 20세기 전반기의 개신교 신학을 대표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자였던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의 설교집이다. 신학을 포함한 서구 문화사를 자유로이 횡단하는 심원한 사유로 ‘지성인의 사도’ 혹은 ‘신학자들의 신학자’라 불렸던 틸리히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하는 케리그마적 신학을 펼친 바르트와 달리 인간의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는 경험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했으며, “인간이 제기하는 실존적 질문에 대해 신학이 답변하는” 소위 상관관계법(Method of Correlation)을 일관되게 적용한 그의 신학체계는 서구 신학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준의 변증신학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2. 또한 틸리히는 죄 ‧ 은혜 ‧ 구원 ‧ 하나님 ‧ 이신칭의와 같이 현대인들에게 의미와 적실성을 상실한 전통적 기독교의 용어나 개념들을 ‘궁극적 관심’ ‘존재의 근거’ ‘소외’ ‘치유’ ‘ 새로운 존재’ 와 같이 익숙한 실존적 용어로 대체함으로서 회의하는 현대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종교란 인간 정신생활의 여러 기능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기능들의 깊이의 차원이라고 강조하면서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 기독교 신학의 지평을 서구문화사 전체나 세계 종교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는 포괄적이고 심원한 문화신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大 신학자의 생애와 신학사상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한 책으로는 단연 함께 읽었던『폴 틸리히 - 경계선상의 신학자』를 추천할 만하다.

3. 서구 문화사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탁월한 지성과 인간의 실존적 위기에 대한 심오한 통찰 그리고 구원을 주는 존재의 근거에 대한 진지하고 궁극적인 관심에 이르기까지. 『흔들리는 터전』『문화의 신학』으로 처음 만난 후 20여년 만에 틸리히의 설교집을 다시 접한 소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격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산타클로스나 모든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해주는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 혹은 교회부흥을 위해 언제나 호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의 저장소 정도로 여기라는 천박한 성공신학 번영신학의 설교가 판치는 오늘날, 인간의 실존적 곤경과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강조하며 복음의 핵심(비록 현대적 정황에 맞게 재진술된 형태이기는 하지만)을 직접 파고드는 틸리히의 설교는 시간의 흐름과 문화적 간격 그리고 그의 신학에 대한 여러 비판과 의혹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적실성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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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존재』거룩한 낭비 中 참으로 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이 여인이 행한 엄청난 낭비를 보고 분개했던 제자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정서적 삶을 잘 통제하고 있는, 또 이 여인이 했던 일을 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심지어 범죄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균형 잡힌 인격을 지닌 사람들은 분명히 그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느끼셨고 초대교회 교인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풍족함이 없이는 그 어떤 위대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합리성이라는 한계 안에 갇힌 종교는 불구가 된 종교이며, 계산적인 사랑은 전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세상은 자신을 낭비했던, 또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남자와 여자들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자신을, 다른 이들을, 그리고 물질을 낭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그리고 창조와 구원 역사 속에서 그렇게 하시듯 그것들을 낭비했습니다 ...... 사람들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뿐 아니라 사랑을 베풀고 낭비하도록 허락 받지 못해서 병이 듭니다.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풍성한 마음, 자기를 포기하는 낭비, 그리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성령을 억누르지 마십시오, 당신의 시간과 힘을 유용하고 합리적인 것만을 위해서 탐욕스럽게 보존하지 마십시오. 낭비처럼 보이는 것의 한 가운데서 나타날지도 모를 창조적인 순간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으십시오.

『새로운 존재』진리가 무엇이냐 中 교회는 아주 일찍부터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그분에 대한 교회의 교리가 진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들은 그 자체로 아무리 필요하고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를 해방시키는 진리가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곧 권위에 의한 억압과 예속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진리에 대한 정직한 추구를 가로막는 수단이자 교회에 대한 충성과 진리에 대한 성실한 추구 사이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분열시키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갈등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율법적 성격의 교리 아래에서 안전함을 느낍니다. 그들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영적 자유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지 못한 자의 안전함입니다. 개신교가 그 추종자들을 그들 자신을 위한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는 불안정성 속으로, 개인적 결단이라는 자유와 책임 속으로, 또 회의주의자와 정통주의자와 무관심한 대중의 방식과 해방시키는 진리이신 분의 방식 사이에서 선택할 권리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갖고 있는 위엄(dignity)이자 위험(danger)입니다. 왜냐하면, 이것,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교리를 넘어서는 그분의 존재 자체가 진리이신 분을 가리키는 것이야말로 개신교의 위대성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존재』예와 아니요 中 “예”와 “아니요”는 모든 진리의 법칙입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용기 있는 “예”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것과 대비되는 또 다른 “아니요”를 갖게 될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안에 “예와 아니요” 가 아니라 오직 “예”만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실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먼저 그분은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아니요” 아래에 서십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유한한 삶 혹은 유한한 진리의 표현에 불과한 그분의 모든 것이 모든 삶과 모든 진리와 더불어 “아니요”아래에 섭니다 .....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졌으며 “예와 아니요”를 넘어서는 삶과 진리가 드러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바로 그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분 안에 나타난 것으로 인해 죽음의 “아니요”는 정복되고 생명의 “예”는 초월됩니다. 죽음과 짝을 이루지 않는 생명과 오류와 짝을 이루지 않는 진리가 그분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또 다른 “아니요”가 없는 최종적인 “예”를 보여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절의 메시지요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 우리는 삶과 진리의 “예”와 “아니요”를 견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와 “아니요”를 넘어서는 예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적인 예”, 즉 우리의 “예”와 우리의 “아니요”를 넘어서는 “아멘”을 외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여호와께로부터 온 말씀이 있었느냐 中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께로부터 온 여러 말씀들은 ..... 정치적 혹은 군사적 힘을 대체하는 전능한 통치자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전지한 교사가 건전한 판단들을 대체하면서 전하는 교훈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늘의 상담가가 지혜로운 인간의 조언을 대체하면서 전하는 조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 모든 잠정적인 관심과 통찰들과 함께 우리의 실존 속으로 깨치고 들어오는 궁극적인 무언가의 드러남입니다. 그런 말씀들은 우리의 상황에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차원에 어떤 차원을 덧붙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온 말씀은 우리의 상황의 심연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 그것은 우리의 상황의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한 목소리 즉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궁극적 관점으로 고양시키는 목소리였습니다.

『새로운 존재』우주의 구원 中 성전과 마찬가지로 땅도 골고다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땅은 두려워 떨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고뇌에 참여했고, 또 그분 안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보았던 모든 이들의 절망에 참여했습니다. 두려워 떠는 땅은 그것이 우리가 그 위에 우리의 집과 도시와 문화와 종교 시스템들을 안전하게 세울 수 있는 대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 두려워 떠는 땅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또 다른 근거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모든 세상의 권력과 가치들이 그들의 적대감을 집중하고 있으나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큰 소리를 지르시고 마지막 숨을 내쉬고 바위들이 터졌던 시간 이후, 땅은 우리가 그 위에 세운 것들의 토대가 되기를 그쳤습니다. 그것은 보다 깊은 근거를 가질 때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서 있는 동일한 기초 위에 서 있을 때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은 삶의 견고한 기초가 되기를 그쳤을 뿐 아니라 죽음의 영원한 무덤이 되는 것도 그쳤습니다 ...... 이제 우주는 더 이상 “출생에서 죽음으로”라는 법칙에 예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보다 높은 법, 즉 영원한 생명을 대표하시는 분의 죽음에 의해 수립된 “죽음에서 생명으로”라는 법칙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변화되었고, 당신과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우리가 아니며, 더 이상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영원한 지금』 잊음과 잊힘 中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알려져 있었다는 것과 미래에 잊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의 진리는 우리의 존재가 거기에서 나오고 거기로 돌아갈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절대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잊힌 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와 마찬가지로 과거 역시 하나님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완전히 과거 속으로 밀려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아무것도 완전히 잃어버려지거나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삶 안에 실재하는 모든 것과 완전히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안과 주위에 있는 비실재적인 것만이 과거 속으로 영원히 밀려납니다. 바로 그것이 “최후의 심판”의 의미입니다 ...... 우리는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고 원했던 우리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은 영원히 잊힐 수 있습니다. 그런 심판은 우리의 삶의 매순간에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시간 속에서는 숨겨지고 오직 영원 속에서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부딪힙시다. 영원히 잊어야 할 것을 잊읍시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존재를 표현하고 영원 속에서 잃어버려질 수 없는 것을 향해 나아갑시다.

『영원한 지금』 영원한 지금 中 모든 사람이 일시적인 지금 안에서 영원한 지금을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아무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때로 그것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강렬하게 뚫고 들어와 우리에게 영원, 즉 시간 속으로 틈입해 우리에게 “우리의” 시간을 제공하는 시간의 차원에 대한 확신을 제공합니다. 이런 차원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에 안식을 얻을 가능성을 잃어버립니다. 히브리서가 묘사하듯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붙들려 있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지 못합니다. 혹은 그들은 현재에 안식할 수 없기에 미래로 도망칩니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우리에게 현재의 축복을 제공하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 각각의 시간의 양태들은 그 나름의 특별한 신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 각각은 우리를 궁극적인 질문에로 몰아갑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입니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의 힘을 억누르는 유일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입니다. 그 영원은 존재하셨고, 존재하며, 존재하실 분이며,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지나간 것에 대한 용서를 제공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아가 오는 것을 받아들일 용기를 제공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의 영원한 현존 안에서의 안식을 제공하십니다.

『영원한 지금』 순응하지 말라 中 여기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불순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상과 우리의 문명과 우리의 교회를 긍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은 인간에게 요구하기에는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렵기에 구약과 신약 성경의 예언자들과 종교개혁가들, 그리고 종교의 역사 전 기간을 통해 우상 숭배와 맞서 싸웠던 리더들은 그들이 이 세대에 대한 순응과 맞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과업에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까지 포함해 무언가에 불순응하고 우상 숭배에 맞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그런 용기 있는 행위가 우리를 고통과 순교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그런 일에서 실패할 위험 때문입니다 ....... 위험을 무릅쓰고 실패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실패도 하지 않는 자는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실패입니다. 그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에 순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을 변시키십시오. 먼저 당신의 그리고 그 후에 당신의 세상을 변화시키십시오. 사랑의 정신과 사랑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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