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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그 사람의 서재 1 (복음과 상황 엮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그 사람의 서재』는 한국을 대표하는 16명의 기독지성인들이 자신의 신앙여정과 독서편력에 대해 밝힌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분들은 손봉호 ‧ 이만열 교수처럼 개혁주의 신앙의 전통에 서 있는 분들에서부터 김기현 목사와 같은 아나뱁티스트, 정용섭 ‧ 김민웅 교수처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 그리고 김상봉 교수처럼 더 이상 기성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분까지 각기 다양한 신앙적 이력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 책과 배움을 통해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 혹은 기존의 제도적 ‧ 지적 체계가 설정한 경계를 넘어섰고, 현재도 자신의 입장을 교조화하지 않은 채 다양한 지적 신학적 전통으로부터의 배움에 열려 있으며, 지적 실천적 삶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배움과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채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꼰대”나 “살아 있는 화석” 이 되지 않으려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단단해진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주는” 이런 분들의 글과 책들을 의식적으로 더 많이 만나야 한다. 놓치기 아까운 내용이 많이 두 차례에 걸쳐 정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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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경계 없는 개혁주의 철학자 나는 바르트에 비해 창조 세계, 자연성, 물질성, 말하자면 푸른 하늘의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흙 속에 뒹구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점에서 나는 여전히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 창조 중심적 자연 신학에 많이 공감하는 편입니다 ....... 20 세기 철학자를 이야기하자만 자아와 타자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과학과 지식의 문제를 다룬 마이클 폴라니, 이렇게 두 사상가를 들 수 있을 것 같군요. 한쪽이 객관주의를 비판하면서 지식의 인격성을 드러냈다면, 다른 한쪽은 주체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타자와의 인격적 만남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기독교 철학자 가운데는 아무래도 월터스토프리처드 마우 등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해요 ....... 책을 읽는 동안, 책에 의해서 내가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공격받을 가능성이 생깁니다. 책이 나에게 우호적일 뿐 아니라 침입해 올 수 있고 내가 당연시한 생각들을 도전할 수 있고, 때로는 나를 피 흘리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책이라는 존재예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세계에 나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소환 가능한 상태로 내어놓는 거죠. 그럴 때 책을 읽으면 나의 성품이 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를 내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용섭, 성경 텍스트에 천착하는 인문주의자 일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다원화된 글로벌 사회에서 한국인에게 유럽과 미국에서 2세기 전에 유통되는 것을 그대로 먹이려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아이가 컸는데 어렸을 때 입었던 옷을 입히는 억지스러운 거예요. 제가 그런 예길 설교 비평에서 한 거예요. (대안은) 2000년 기독교 역사가 면면이 가져온 역사로 돌아가자는 거죠. 그게 교부 신학인 거예요. 그걸 판넨베르크한테서 배웠어요. 그는 4세기까지의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해요.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이죠 ........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인문학이란 인간 삶의 흔적을 따라가는 노력, 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고 성서는 인간의 삶이 중층적으로 녹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고요. 그런데 그런 것 빼고 적용, 예화, QT식 성서 읽기로 인간에게 종교적 위로를 주는 것 정도로 성서를 대우하는 것, 성서를 실용화하고 도구화하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왜냐 하면 그렇게 되면 성서 텍스트가 정작 말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성서 텍스트,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은 실증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말하는 건데, 설교자들이 성서 자체를 말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성도가 듣고 싶은 말만 해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 곧 은폐된 성서를 볼 수 있게 만드는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훈련이 인문학적 사유, 인문학적 읽기인 거예요 ......... 이 인문학이 담고 있는 인간 삶의 흔적과 무늬와 묘가 고스란히 성서에도 담겨 있기 때문에 인문학적 훈련 없이 성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송인규, 보편성을 추구하는 평화적 개혁주의자 저는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또 그 안에 속해 있지만 여러 신학 사조를 아울러 생각하는 습관을 키우려고 해요. 모든 사상에는 맥락이 있기 때문에 그걸 잘 아우르는 게 필요해요. 그것은 자기 주체성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죠. 모든 개별적 입장은 그 무엇이든 진공에서 생긴 게 아니기 때문에, 독특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더 넓은 사상적 ‧ 문화적 ‧ 신학적 맥락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평화적 개혁주의라고 하고 싶어요. 자신과 다른 입장을 무조건 백안시하거나 일고의 가치도 없는 듯 취급하거나 아니면 그저 비판을 위한 대상으로 취급하는, 공격적 리폼드가 아니라는 거죠. 삶은 복잡하고 다차원적으로 뒤엉켜 있잖아요 ...... 첫째는 인지적 요인으로서 잘 모르던지 혹은 일부만 알고 있기 때문에, 둘째는 심리적 요인으로서 두렵기 때문에, 불필요한 극단화와 매도 행위가 자행되곤 하지요. 이런 현상들은 특히 어떤 존중받는 인물을 중심한 아류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류는 원조가 지닌 포괄성과 융통성, 그리고 모험 정신을 견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잘 모르고 두려워하면 아류가 되고 분파주의가 되는 거예요. 반대로 폭넓고 깊게 알면 훨씬 더 자유롭고 또 자연스럽게 되죠. 모르고 두려우면 절대 관대해질 수가 없어요.

권연경, 말과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 성서학자 나는 스스로 개혁주의자라고 생각해요. 아니라는 사람들도 많겠지만.(웃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전통을 숭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딴죽을 거는 게 필요합니다. 교회가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반대로 치우치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거죠. 나 자신만 보면 한쪽으로 치우쳐 있겠지만 교회의 전체적인 상황에서 보면 그래야 균형이 잡히니까요. 적어도 열매로 볼 때, 개혁주의 교단이 다른 전통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어요. 이 점에서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솔직하지 못하거나 착각에 빠져 있어요 ....... (저서인 『행위 없는 구원?』에 대해서) 책의 내용을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논증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많았어요. 저는 바울서신을 그대로 읽어보자고 제안한 것인데, 대부분의 답변은 “종교개혁 신학과 다르다”거나, “가톨릭의 공로주의와 비슷하다”는 식의 동문서답이었어요. 개혁주의도 옛날의 개혁주의가 아니고, 가톨릭도 지속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데, 가톨릭과 비슷하니 개혁주의가 아니라는 식의 말은 논리가 아닌 유사 논리죠. 무엇보다도 답답한 것은 우리가 아직도 칼뱅이 상대했던 그 적들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역사적 목회적 무감각이에요.

손봉호, 선지자를 닮은 철학자 (내 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책을 꼽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라인홀트 니버『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입니다 ....... 내가 그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신학 전체를 다 수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책으로부터 얻은 바가 많다는 것이죠. 그 책의 인간관과 사회관은 상당할 정도로 개혁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보다 사회가 더 악하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칼뱅주의 전통에 맞닿아 있습니다. 니버는 인간 집단이 얼마나 비도덕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나에게 깨우쳐 주였습니다. 소위 눈을 번쩍 뜨게 해준 책이죠. 무슨 주의, 무슨 주의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하비 콕스 같은 자유주의 학자는 저하고는 신학적으로 사상이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그가 창세기가 자연의 비신화화를, 출애굽기가 정치권력의 비신화화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개혁주의가 성경과 세상을 바로 보게 하는 좋은 안경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모든 진리를 독점적으로 제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기윤실 운동을 하면서 진실, 정직 같은 것을 강조해 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정의가 먼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최근 존 롤스의 정의와 성경의 정의관에 대해 강의하다가 옛날에 읽은 이근삼 박사의 논문이 생각났는데,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하나님의 끈질긴 편견’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다르다는 거예요. 정확한 균형이 아니라 약자에 좀 더 관심을 갖는다는 거죠. 구체적 현실에서 이미 약자는 억울함을 당하고 있으니, 그 편을 드는 건 균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김기현, 성서와 독서에 미친 토종 아나뱁티스트 (개혁주의 세계관 운동이 전제하고 있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구도 자체를 저도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개혁주의식의 창조, 타락, 구속을 설명하는 책이 성서적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거예요. 예컨대 창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창세기 1장을 언급하지만, 창세기가 기록된 애굽적 정황이나 편집되고 최종 정리된 바벨론적 정황에서 읽지를 않아요. 그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화석 조각을 보여 주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한다면, 노예와 포로로 살아가는 그들이 과연 구원과 해방의 복음으로 들었을까요? ......... 기독교의 합리성을 서양 근대적 이성, 즉 데카르트적 합리성으로 치환함으로 근대를 비판하지만 결국 근대성에 굴복하는 오류를 범하고 마는 쉐퍼에 대해 그동안 비판을 많이 했죠. 바르트가 쉐퍼에게 보는 편지에서 잘 지적했듯이, 형사와 조사관처럼 또는 이교도를 개종시키려는 선교사의 자세를 가진 쉐펴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콜슨은 개혁주의 세계관에 충실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함께 문화 명령을 말하지만 이라크에 대한 선재 공격을 지지하는 것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그가 꿈꾸는 질서는 미국의 패권적 질서임에 분명하죠. 그런 면에서는 오스 기니스도 마찬가지죠 ......... 이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교회의 대의인 하나님 나라와 자신의 국익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상의 전형입니다. 국가주의, 군사주의, 인종주의, 물신주의 등은 우상의 구체적 실례입니다. 그것을 존 요더는 콘스탄틴주의라고 했고, 저는 혼합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양쪽을 뒤섞으면 당장은 교회가 유익을 얻을는지는 몰라도 최종적으로는 교회가 타락하고 교회가 국가와 지배 계층에 종속당하지요.
강영안 | 경계 없는 개혁주의 철학자
박영선 | 하나님의 열심에 항복한 사람
김두식 | 성역 없는 비평적 평화주의자
정용섭 | 성경 텍스트에 천착하는 인문주의자
송인규 | 보편성을 추구하는 평화적 개혁주의자
우종학 | 별 헤는 마음으로 신앙과 과학을 탐구하는 별아저씨
권연경 | 말과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 성서학자
손봉호 | 선지자를 닮은 철학자
이만열 | 우리 시대의 예언자적 역사가
김기현 | 성서와 독서에 미친 토종 아나뱁티스트
김기석 | 신의 당파성을 증거하는 일상순례자
김민웅 | 문․사․철을 종횡무진 휘젓는 자유인
백종국 | 현실과 이상을 부둥켜안은 정치경제학자
김상봉 | 길거리 위의 철학자
송인수 | 교실 밖 우리들의 선생님
김회권 |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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