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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그 사람의 서재 2 (복음과 상황 엮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지난번 리뷰에 이어『그 사람의 서재』 에 나오는 놓치기 아까운 몇몇 분들의 통찰을 다시 한번 곱씹어가며 옮겨 보기로 한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화석화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일찌기 노자도 죽은 것은 굳어 있고 딱딱하지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유연하고 부드럽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 시대의 예언자적 역사가, 이만열   1950년에 나온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1934-1935년에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서 낸 책인데 당시는 그 명저를 이해하지 못했죠. 사실 함 선생의 책을 제대로 읽은 것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지금은 조금 열려 있다 하지만, 그때는 고신의 폐쇄적인 분위기에 너무 젖어 있어서 쉽사리 마음이 열리지 않아 그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제대 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 책을 탐독하게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깨우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최근에 그 책을 한국의 사학사적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어요. 근대적 역사관을 가지고 한국 역사를 일관되게 본 최초의 역사라는 거지요. 함석헌 선생의 글은 논리적이지는 못하나 직관적인 혜안과 솟구치는 힘이 있고, 어설픈듯하면서도 비수가 숨어 있는 그의 비판은 용기 없이 움츠리고 있던 우리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거지요 ...... “우리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걸 학문(신학)화 하되 보편성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신학은 당연히 우리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을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이런 말 하면 고신에서는 죽일 놈이라고 하겠지만, 난 민중신학의 내용이 좋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 문제의식을 토대로 신학화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그게 제대로 됐어야 하는데 중단돼 버렸지요.

신의 당파성을 증거하는 일상순례자, 김기석   저는 문학가들로부터 치열함을 느꼈어요. 기존의 사고틀 속에서 삶을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질문하는 태도에 매료된 거죠. 그에 비하면 신학자들은 어느 선에서 멈춰버리기 때문에 화가 났어요.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인간에 대한 성찰은 깊은 질문에서 비롯하는데 신학자들은 제가 볼 때 철저하지 않아 보였어요. 반면 문학하는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바닥까지 내려가지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문학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틸리히 같은 경우 암시를 많이 주기도 했습니다만,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라든지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신비주의 영성가를 통해 합리성 너머의 어둠의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 저는 한국교회가 성서를 바로 읽어낸다면 인문학과 충돌하는 부분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과 문학은 언어의 문법이 다릅니다. 교회는 신학을 통해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있어요. 콘텍스트가 질문하면 텍스트가 대답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오만한 이야기입니다. 답을 가진 사람의 답이, 사실은 답이 아니라는 거죠. 교회는 늘 그런 식으로 대답해 왔어요. 그러니 소통이 안 되는 거죠. 인문학이란 결국 타자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지에 대한 질문이에요. 타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인문학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문 ‧ 사 ‧ 철을 종횡무진 휘젓는 자유인, 김민웅   인문학은 모든 영역에서 중요하죠. 인생과 역사를 배우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인문학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방식이자 사고체계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어요. 보통 소통이 안 되는 것은 경청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자기 시선에 문제가 있다면 경청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요. 내용을 채워야 하는 겁니다. 그걸 채우는 게 바로 인문학적 교양이죠. 그 안에 인간의 갈등, 역사의 문제, 지구의 고민, 사람들이 직면한 도전과 해석 등을 지적하고 정서적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으로 다양한 인생을 살아보자는 게 핵심이에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고 그 질문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더욱 분명하고 깊이 있는 대답을 모색해 나갈 수 있겠지요. 인문학은 그렇게 인생을 풍요롭게 해 주고 시선을 형성하게 합니다. 성서는 보기에 따라서는 사실 불친절한 책이에요. 자세한 설명은 없고 진리가 압축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인문학적 해석 능력이 요구됩니다. 풍부한 현장 경험과 인문학적 질문이 없다면 성서 해석은 한계에 봉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 기독교 마르크스가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은 냉전 교육의 오류죠. 결코 기독교 신자라 할 수 없는 플라톤과 기독교가 만나 중세의 신학적 체계를 형성했어요. 이렇듯 오늘날 자본주의적 현실의 모순과 고통,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에 무엇인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와 분석, 이는 오늘날 기독교에 필수적인 지적 자양분입니다. 이걸 통해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정의로운 시스템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가능하죠.

현실과 이상을 부둥켜안은 정치경제학자, 백종국   이론과 실제 두 가지 점 모두에서 저는 라인홀트 니버에게서 지적인 자극을 받았습니다. 라인홀트 니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학자입니다. 니버는 “선한 인간이라고 해서 선한 체제를 유지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죄수의 딜레마처럼 어느 구조에 빠지면 인간의 선한 의지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리고 만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니버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니버의 논리가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유한함, 죄성을 강조하면 새로운 체제 특히 혁명을 위한 역동성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저의 경우 ‘혁명 이론’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이론이 옳아서가 아니라 일정한 효용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 자본주의 제체의 질곡이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마르크스주의는 말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질곡의 대부분은 착취입니다. 그러면 착취가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날까요? 농경사회, 봉건사회에서도 나타났고 수렵사회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어떤 분은 그 이유를 인간의 죄성 혹은 인간의 욕망이라고도 하는데 그건 신학자의 소리고요. 정치학자는 ‘권력의 비대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는 권력가와 노동자 사이의 비대칭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없애면 해결되느냐. 그게 아니라 권력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를 대칭적으로 바꿔 줘야 해결됩니다. 성경은 노예주나, 지주, 자본가의 선한 의지만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길거리 위의 철학자, 김상봉   젊은 시절 가장 좋아하던 성경 구절 중 하나가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주노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는 것이었는데, 이 말씀은 독재치하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표준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인간을 노예적으로 억압하는 어떤 권력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으며, 내가 복종해야 할 대상은 오직 진리와 절대자일 뿐 다른 어떤 것에도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면 안된다는 것은 기독교가 내게 준 가장 큰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지요. 문화적으로 보자면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순응을 가르치는 종교요, 사람을 비굴하게 만드는 종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가 기독교에서 배운 것은 어떤 경우에도 종의 멍에를 매어서는 안 된다는 자유인의 정신이었죠 ......... 저는 민중신학, 해방신학에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교의학과 조직신학적, 철학적 토대를 생각할 때 민중신학이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요. 종교와 신학은 똑같은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해 말하더라도 사회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사회정의를 신학적 언어로 말하는 것이라면 사회과학을 하면 되지 신학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너무 사회과학적으로 기울어진 나머지 신학이 지켜야 할 삶의 종교적 차원을 방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민중신학이 한국의 기독교에서 지속적인 생명력과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도 하지요 ...... 혁명과 종교는 한국의 역사상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미륵신학, 동학혁명, 삼일운동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걸 철학적으로 보여 준 이가 함석헌 선생이예요. 성과 속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로 존재했던 이가 바로 함석헌이었지요. 그러니까 교회의 주류 입장에서 볼 때 함석헌의 텍스트는 너무 정치적이어서 싫고, 정치적 운동가의 입장에서 보면 함석헌은 너무 종교적으로 비쳤던 거죠. 그런데 민중신학이 충분히 함석헌을 이해했을 법한데 학문적으로는 거의 백안시했으니 제겐 그것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큰 아쉬움으로 남는 거죠.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예언자, 김회권   하나님 나라의 신학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의 하나님 나라 신학은 칼뱅의 하나님 주권 사상, 하나님의 영광 추구의 신학에서 나왔습니다. 칼뱅의 신학은 구원론적인 신학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는 신학입니다. 교회론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지요. 독일 고백교회의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 예를 들면 칼 하임, 칼 바르트, 위르겐 몰트만, 헬무트 골비처 등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신학자들의 주된 주제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유럽의 기독교 문명과 다른, 문화보다 외연이 큰 하나님의 통치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교회에 주어진 최대의 신학적 축복이라고 봤습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전위 기관으로 생각하지,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는 주장을 의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대 문화와 자본주의 질서와 사회주의와도 전적으로 다르며, 지상의 기독교 문명과 궤도를 달리하는 초월적인 나라입니다. 이런 신학 전통 아래서 칼뱅구띠에레즈가 화해하고, 불룸하르트레오나르도 보프가 화해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도 이 전통 안에서 서구의 전통신학과 화해합니다 ..... 저는 ‘영광의 무게’를 견딜 힘이 독서에 있다고 봅니다. 인격을 고상하게 하고, 삶의 속물적 즉흥주의를 뛰어넘게 만드는 것이 독서라고 믿습니다. 독서로 단련된 사람은 중대한 삶의 기로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인류의 누적된 집단 지혜의 인도를 보여 주는 필수 고전의 독서 없이는 가장 중대한 순간에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실패합니다.
강영안 | 경계 없는 개혁주의 철학자
박영선 | 하나님의 열심에 항복한 사람
김두식 | 성역 없는 비평적 평화주의자
정용섭 | 성경 텍스트에 천착하는 인문주의자
송인규 | 보편성을 추구하는 평화적 개혁주의자
우종학 | 별 헤는 마음으로 신앙과 과학을 탐구하는 별아저씨
권연경 | 말과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 성서학자
손봉호 | 선지자를 닮은 철학자
이만열 | 우리 시대의 예언자적 역사가
김기현 | 성서와 독서에 미친 토종 아나뱁티스트
김기석 | 신의 당파성을 증거하는 일상순례자
김민웅 | 문․사․철을 종횡무진 휘젓는 자유인
백종국 | 현실과 이상을 부둥켜안은 정치경제학자
김상봉 | 길거리 위의 철학자
송인수 | 교실 밖 우리들의 선생님
김회권 |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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