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성경과 편견』은 Misreading Scripture with Western Eyes 라는 영어제목에서 잘 알 수 있듯, 오늘날 성경읽기의 보편적 전범으로 인정받고 있는 서구의 ‘눈’으로 성경을 볼 때 어떻게 그 진의가 왜곡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문화 인류학적 통찰을 성서시대의 이해에 접목시킨 브루스 말리나의 유명한 책 『신약의 세계』의 내용을 성경과 일상을 대본으로 하여 친절하게 풀어 설명한 해설서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2.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오래 사역한 바 있는 랜돌프 리처즈를 포함한) 저자들은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처한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게 마련이기에 100% 객관적인 성경읽기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역사와 문화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다른 눈으로 성경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 서구인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화와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는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며, 자신들의 문화적 전제로 인해 성경의 본래 청중과 타문화권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보는 것을 보지 못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성경의 세계인 고대근동과 훨씬 흡사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비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를 압도해가고 있는 지금, 전통적인 서구적 성경해석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모든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표준이 될 수 없다.
3. 저자들은 이 책의 목적이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이 교차 문화적인(Cross-Cultural)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성경의 세계와 우리를 분리시키는 문화적 차이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이 책에서 성경을 읽는 서구인의 일반적 패턴을 보여주고, 성경을 해석할 때 인식해야 할 서양 문화와 非서양 문화 간의 아홉 가지 차이점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1부에서는 명백히 눈에 띄기 때문에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적은 문화적 사안(관습, 인종, 언어)을, 2부에서는 바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찾아보면 눈에 띄는 주제들(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명예/수치 vs 옳고/그름, 시간)을, 그리고 3부에서는 깊숙이 숨어 있어 찾아내기 어려운 것들(규칙과 관계, 미덕과 악덕, 하나님의 뜻)을 다룬다. 우리가 가진 문화적 편견을 일상과 성경에서 취한 다양한 예를 통해 하나하나 벗겨내는 저자들의 탁월한 솜씨는 이 책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4. 저자들은 결론에서 이러한 문화적 색안경을 제거하는 지름길은 없다고 강조하면서 (1) 이 문제가 몇 가지 원리를 적용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하고 노력이 필요한 사안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2) 모든 해석이나 교리나 적용을 ‘문화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과잉 교정의 유혹을 피해야 하며, (3) 자신의 세계관과 성경의 가르침을 반성 없이 동일시하며 변호하기를 그치고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통찰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해야 하고, (4) 전통적이고 안전한 해석틀에 안주하기보다는 오류의 위험성이 있다 할지라도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며, (5)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해석만 들으려 하지 말고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5.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현대 서구문화의 정황에서 쓰여진 책이다. 그러나 서구적 맥락, 그중에서도 특히 북미의 특정 시기를 지배했던 문화적 ‧ 신학적 해석틀에 맞지 않는 모든 성경읽기를 의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란 피부, 하얀 마음”을 가진 한국의 보수교회와 그 성도들에게도 매우 적실한 책이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훌륭하지만 내 것이 아닌 남의 안경을 끼고, 가려운 내 다리가 아닌 남의 다리만 열심히 긁고 있어야 하겠는가? 저자들은 그다지 동의할 것 같지 않지만 내게는 “나의 뿌리는 개혁교회이지만, 나의 미래는 하나의 교회다”라는 위르겐 몰트만의 일갈이 이 책을 읽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인 것처럼 느껴진다.
목차
서론. 우리의 문화적 색안경, 어떻게 할 것인가
1부. 수면 위
1. 두 주인을 섬기는 것: 관습의 문제
2. 성경과 피부색: 인종의 문제
3. 언어는 단어일 뿐인가: 언어의 문제
2부. 수면 바로 아래
4. 내 영혼의 선장: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5. 수치심의 문제: 명예/수치 vs. 옳고/그름
6.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모래: 시간의 문제
3부. 수면 아래 깊숙한 곳
7.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적으로: 규칙과 관계
8. 예수님의 목소리인가, 붉은 암탉의 목소리인가: 미덕과 악덕
9. 모두 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면
결론. 우리의 문화적 색안경을 제거하는 세 가지 단계?
본문 엿보기
관습 관습은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장소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등 덜 영구적인 경우가 훨씬 많다. 예를 들면, 미국 내에서도 어떤 기독교적 가치들은 지리에 따라 변한다. 남부의 경우,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카드 놀이를 마귀의 장난으로 취급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카드 놀이는 점점 용납할 수 있는 게임이 되었다. 미네소타에 이르면, 교회 안에서 브리지 토너먼트를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담배를 재배하는 동부 연안 지방에서는 강단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한, 흡연이 얼마든지 허용되었다. 거기서 서쪽으로 갈수록 흡연은 점점 더 덜 용납되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면 흡연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 되고 말았다. (어느 서부 연안 목사는 그 교회가 간음을 정죄하는 이유는 간음이 흡연을 부추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어떤 행실이 다른 행실보다 좋거나 나쁘다는 우리의 위계질서는 문화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전수되었다. 우리의 관습이 보편적이며 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우리와 똑같이 여겨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보다 더 위험한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관습을 렌즈삼아 세상을 보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음식 (불결한 집승을 먹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반응은 우리에게 독선적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행 10:14). 그런데 그 환상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단지 의로운 분노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구역질일지도 모른다. 보자기에 싸인 동물들을 먹는다는 상상만 해도 메스꺼움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 돼지고기와 조개류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든다면, 이는 법적인 문제다. 그러나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음식에 관한 확고한 문화적 관습이었다. 만일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강아지와 박쥐와 바퀴벌레가 가득한 보자기를 내려 주시면서 잡아먹으라고 명령하신다면 아마 우리도 베드로처럼 느끼지 않을까? .......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신자들도 유대교의 음식법을 시켜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려고 했을 때 교리를 둘러싸고 공리공론을 일삼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옛날 사람들도 특정한 음식에 대한 느낌을 그것을 먹는 사람들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다. 선한 유대인은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돼지고기를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구역질을 못 이겨) 빨리 화장실로 달려가던 시대였다.
인종 창세기 27:46에서 리브가는 에서의 아내들로 인해 불만을 토로하는데, 에서가 아내를 여러 명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인종 때문이었다. 리브가는 이삭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헷 사람의 딸들 때문에 사는 게 아주 넌더리가 납니다.... ” 리브가의 말에는 인종적 편견이 가득하다. 헷 사람들은 그녀를 몹시 짜증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이 그런 공백을 우리의 편견으로 메우는 경향이 있다 ..... (남부 갈리디아인들은) 자신이 북부 지역의 못 배운 야만인들과 혼동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 지역의 교회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자, 바울이 그들을 책망하는 편지를 썼다. 거기서 그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갈 3:1) 라고 거칠게 부른다. 이는 오늘날 “이 멍청한 촌놈들아”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바울은 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인종적 비방을 사용한다. 우리는 바울이 그런 말을 했으리라곤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직감이 그 논점을 잘 보여준다. 인종과 인종관계에 대한 우리의 전제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및 행실에 관한 중요한 논점을 개진하려고 인종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개인주의 성향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일부 내용이 쓰인 방식에 대해서도 오해할 수 있다.우리가 이메일을 열어 놓고 편지를 쓰듯이 바울도 그의 편지를 썼다고 상상한다. 말하자면, 조용한 곳에서 펜과 종이를 준비해 책상 앞에 앉아서 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의 편지쓰기는 거의 모든 면에서 달랐다 ..... 바울이 편지를 쓰기 위해 방에 따로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쨌든 너무 어두웠을 것이다.) 오히려 공적인 장소에 앉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 가족과 친구들이 지나가다가 듣고(옛 사람들은 소리 내어 읽었다) 조언을 했을 것이다(당신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행동이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답장을 할 때가 되자 사랑하는 팀원들을 모으고 고린도 교회의 필요가 그들의 할 말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많다. 까다로운 쟁점을 한참 논의한 후, 아마 시장에서 고용했을 비서와 많은 밀랍 필기장을 준비한 채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결과 공동의 노력이 담긴 편지가 탄생했을 것이다. 우리는 편지의 인사 부분에 공동저자가 언급된 것을 보면서 그들을 수동적 참여자로 생각한다. 우리는 바울이 그 편지의 배후에 있는 창조적이고 신학적인 귀재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척 의심스럽다. 오히려 그 편지들은 공동 저자들이 능동적으로 개입해서 쓴 편지일 가능성이 더 높다.
명예/수치 vs 옳고/그름 신학자 크리스터 스텐달은 어느 획기적인 글에서 서양인들의 자기 성찰적 양심은 성경 저자들에게 생소한 것임을 입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필두로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이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렸으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용서의 메시지로 변화되었던 것이라고 이해했다. 루터는 서양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오라고 설파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진술, 즉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따르면 그의 삶에 흠이 없었다는 진술(빌 3:4-6)을 자주 건너뛴다. 바울은 회심 이전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조짐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죄책감이 없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한 깨달음’이 당연히 내면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런 방식으로만 일하신다고 잘못 생각한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내적 깨달음(죄책감) 그리고 외적 깨달음(수치심) 모두를 사용하신다. 고대 세계와 비서양 세계는 명예/수치 문화를 갖고 있고 서양은 무죄/유죄 문화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양자 모두에서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으시다 ..... 성경은 명예/수치문화에 속한 중동 저자들이 썼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실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성경에 사용된 명예와 수치의 언어에 민감해야 한다.
시간 우리는 시간을 낭비할 때 무척 짜증을 내지만, 다수의 비서양인은 그렇지 않다. 나의 인도네시아 어부 친구들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최종 기한이 있다. 월말이 다가온다. 시간이 다 떨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시간이 ‘다 떨어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내일이 없는 마지막 날(즉, 죽는 날)이 되기까지는 언제나 내일이 있을 터이고, 마지막 날에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미루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내일까지 미룰 수 있는 일을 왜 오늘 하는가? 내일이 오면 그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서양인은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다 떨어지고 있다고 안달을 한다! 지금도 시계가 째깍거리고 있다! .... 정확한 시간이란 서양에서 시계와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서양인들은 시간이란 별개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어서 수량으로 표시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점 바빠지고, 행사를 시작할 정확한 시간은 점점 명확해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非서양 세계에서는 정확한 시간이 어떤 조건이나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앤 엘머 등은 이들은 이것을 ‘행사 지향성’이라고 부른다. 시간은 탄력이 있어서 행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좌우된다. 시간의 양이 아니라 행사의 질이 일차적인 관건이다. 관계가 시간보다 중요하기에 모든 사람이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행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규칙과 관계 바울은 후견 시스템(patron-client relationship)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 안에서 일했고, 심지어는 구원의 메시지를 설명할 때도 그러했다. 후원 관계는 그 나름의 어휘가 있었다. 우리가 기독교 용어로 생각하는 단어 가운데 일부인 ‘은혜’와 ‘신앙’은 바울이 그 단어들을 채용하기 전에는 일반적인 어법이었다. 후견인이 베푼 과분한 도움은 보통 ‘카리스’(charis, 은혜 혹은 선물)라고 불렸다. 이에 보답하여 피후견인이 후견인에게 바친 충성은 ‘피스티스’(pistis, 신앙 혹은 신실함)라고 불렸다.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를 설명할 때 고대의 후견 시스템을 활용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을 사용한 셈이다. 달리 말하면, 당시에는 은총의 최우선 측면이 관계라는 점은 말하지 않아도 통했다. ....... 위험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적인 규칙으로 대치하는 처사다. 이런 경향은 우리가 사용하는 신학 용어에 나타난다. 많은 복음주의자는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지위를 법정에서 사용하는 칭의 언어로 묘사한다. 이 교리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와 하나님의 연관성을 관계가 아닌 규칙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한다. 그런데 은혜와 믿음은 법정의 판결이 아니라 관계를 가리키는 표지다. 바울이 이런 용어들을 사용한 것은 어떤 계약이나 법원 판결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중심인 나 나를 최고로 생각하는 서양 문화에 대해 가장 깜깜한 사람은 서양인들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의 중심을 찾는 것은 옳지만, 일단 그 중심을 찾고 나면 나의 이름이 거기에 새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수백 년간 서양 문화는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성경을 읽도록 부추겨 왔다 ...... 서양 그리스도인들은, 여태까지 태어난 죄인이 나밖에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을 것이라고 믿도록 배웠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나에 관한 것이 아니란 점을 깨달으면 비로소 성경의 진정한 주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다. 하나님은 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회복시키시는 중이고, 나는 하나님 나라 사역의 중심이 아니다.
<성경과 편견>
문화인류학과 사회학의 통찰을 성경에 적용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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