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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비판적 켈러읽기

팀 켈러 읽기 (6) 후기 - 몇몇 반론에 답하며

by 서음인 2018. 3. 19.

팀 켈러에 대한 평가를 담은 글에 많은 분들이 여러 이야기들을 해 주셨습니다. 그중 한 분께서는 자세한 비평글도 달아 주셨고요. 3주전 이름 빼고 거의 알지 못했던 켈러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항상 그래왔듯이 페북에 이런저런 단상을 쏟아놓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뜨거운(?) 반응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가 잘 몰랐을 뿐 그만큼 핫한 저자였다는 뜻이겠지요. 어자피 원글이 전문적인 신학적 분석이 아닌 감상평이고 논쟁을 일으킬 의도로 쓴 것도 아니었으니 이 반론글을 굳이 페이스북에 올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만, 원글에 대한 이러저러한 반응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과 원글에 쓰려다가 지나치게 공격적일 것 같아 올리지 않았던 내용들을 모아 한번 정리해 놓을 필요는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이제 켈러와는 이별하는 것으로! 

먼저, 팀 켈러가 톰 라이트나 선교적 교회, 하나님 나라 개념을 나름대로 소화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이거니와 사실은 그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왜 켈러는 본인이 ‘실질적’으로는 빌어 쓰고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본문이나 각주에 굳이 습관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족을 붙이는 것일까요? 저는 켈러의 이런 모습을 보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이 미국판 홍길동은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혹은 부르지 '않는' 것일까요? 물론 팀 켈러의 입장에서는 여성안수조차 허용하지 않는 보수적인 PCA 교단에 속한 대형교회 목회자라는 자신의 ‘포지션’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런 그를 ‘답답하다’고 평가하거나, ‘학’이나 ‘아웃복서’에 비유한 것이 불공평하거나 지나친 일이었을까요?

두번째로 ‘반성의 부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센터처치에 나오는 ‘상황화’를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서 저는 레슬리 뉴비긴<오픈 시크릿>에 나오는 흥미로운 구절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뉴비긴에 따르면 복음전도자가 성경을 수용자 공동체의 언어로 번역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주게 되면 그 때부터 성경이 그 부족의 전통문화선교사들이 전해 준 기독교 모두를 겨냥한 독자적인 비판의 근거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전통문화선교사의 기독교 모두를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격랑 속으로 밀어넣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켈러는 위험을 무릅쓰고 ‘정통교리의 옷을 입은 서구 기독교’를 위에서 뉴비긴이 말한 '번역된 성경/번역된 기독교'의 ‘비판’과 그 결과 따라올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앞에 노출시킬 용기를 가진 분일까요? 켈러가 말하는 ‘상황화’란 혹시 그가 시공을 초월한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고전적 개혁주의의 교리 체계를 21세기 뉴욕의 다문화적 상황 속으로 세련되게 번역하려는 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반성’이라는 말마크 놀<나는 왜 세계기독교인이 되었는가>를 인용하자면, “내가 품었던 기독교(즉 서구기독교)가 일개 지역의 문화적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자,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설’같은 전통적인 루터파 공식이 21세기 아프리카(여기서 '아프리카'는 세속화된 도시인 뉴욕이나, 다신교 사회인 일본, 힌두교 국가인 인도, 이슬람 사회인 파키스탄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에서 16세기 독일에서만큼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과연 옳은지 진지하게 재고할 수 있을 정도의 결기를 품는 일입니다. 저는 그분이 '반성의 부재'라는 제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읽기를 권유했던 <센터처치>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 책에서 켈러가 말하는 '상황화'가 제가 위에서 언급한 '반성'과 같지 않으리라고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현재 제 관심은 ‘세계기독교’입니다. 저는 켈러가 보수적인 신앙을 유지하며 뉴욕의 다문화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사역하고 있는 훌륭한 목회자이자 신실한 그리스도의 증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교리의 체계에 잘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신학적 개념이나 운동들을 여러 모양으로 인용하고 활용하면서도 굳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족을 붙이거나,  모든 '새로움'을 자신이 믿고 있는 '개혁-보수-정통 교리체계'의 언어로 환원하고 그 질서 안에서 위계를 부여한 후에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정통교리 강박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저는 팀 켈러가 “세계기독교인”이라고 불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켈러가 독자로서의 제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닌 이유이자, 그가 제가 떠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고 믿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세계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두 저자의 말을 옮겨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교회적 ‧ 신학적 ‧ 도덕적 범주는 역사적이고 상황적이지만 동시에 참다운 기독교 진리에 온전히 참여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역사는 모든 시대의 족속과 민족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기독교”의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는 복음주의 역사신학자 마크 놀의 말과,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교회 내에서만, 나 자신의 땅 위에서만 신학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신학하기를 시작했다. 나의 뿌리는 개혁교회이지만, 나의 미래는 하나의 교회다”라는 거장 위르겐 몰트만의 말입니다. 과연 이곳에 팀 켈러가 낄 자리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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