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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학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 (곽건용 지음, 꽃자리 펴냄)

by 서음인 2016. 5. 29.

1. 서울대 사회학과와 한신대를 거쳐 현재는 미국 LA 향린교회를 섬기면서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을 전공하고 있는 저자는 우연히 <하느님의 생식기 God's Phallus> 라는 충격적인 제목을 가진 책을 접한 후 하느님의 몸 (God's body), 혹은 하느님의 물질성 (materiality of God) 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저자의 꾸준하고 진지한 학문적 탐구의 결과가 바로 오늘 내 손에 들려 있는 흥미로운 책,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이다.

2. 저자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물질적인 몸을 가진 존재임을 분명히 전제한다.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관에는 물질과 구별되는 다른 세계, 즉 영적 세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야훼를 물질적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구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몸을 갖고 있으며 사람처럼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할 수 있고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해 있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분이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신인 동형론 anthromorphism) 구약성서의 몇몇 구절들을 자세히 살핀 후, 실제로는 이 표현들이 하나님의 ‘물질적인 몸’을 묘사하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쳐나간다. 하나님에 대한 은유적 표현은 추상적이고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구상적이고 물질적인 존재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구상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인 야웨를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직접’ 표현할 수 없었던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사용한 하나의 방편 (일종의 완곡어법?)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웨에 대한 은유와 상징을 추상적 영적인 존재를 구상적 물질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관점은 영/육의 이분법에 의거한 그리스적 사고를 구약성서에 잘못 적용한 예일 뿐이다.

3. 그러나 저자는 구약성서도 하나님을 세상과 똑같은 물질/몸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았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구별되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구약성서 역시 물질계와는 다른 영적인 세계가 존재함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으며, 야웨의 ‘초월적’ 세계와 사람의 ‘현실세계’는 절대로 건널 수 없게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는 신약성서의 이해와는 달리 두 세계가 서로 섞이고 중첩되어 있으며 가끔은 서로 만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에 의하면 이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는 전적으로 물질세계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형상’ 이 아닌, 두 세계에 함께 속한 야웨의 ‘목소리’ 일 수 밖에 없다. 만약 사람이 야웨의 형상을 만들면 그때부터 야웨는 인간의 외부에 객관화되어 존재하는 조종 가능한 대상 (우상) 이 되어 더 이상 인간에게 ‘말하기’를 그치게 되며, 이렇듯 ‘말하기’를 그친 야웨는 더 이상 하나님이기도 그치게 된다.

4. 구약성서는 언약궤 혹은 성막을 ‘물질적’인 야웨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실제로 현존하는 장소로 이해했으며, 그 이동가능성은 하나님의 자유와 주도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야웨의 자유를 제한한 채 그 현존이 보장하는 혜택만을 영구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소유하고 싶어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궤를 예루살렘에 가져다가 영구히 두려고 했던 다윗 왕, 그리고 ‘성전신학’ (temple theology) 혹은 ‘시온신학’ (Zion theology) 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전을 야웨 자신이 현존하는 곳이 아니라 그 ‘이름’을 둔 장소로 이해하는 신명기전승 ‘이름신학’ (name theology) 은 ‘형상’ 이 강조하는 메임과 수동성이 아니라 ‘이름’ 이 표상하는 자유와 능동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야웨의 물질적 현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형상’으로 표현되는 시각에서 ‘이름’ 으로 대표되는 청각으로 이동시킴으로서 한편으로는 야웨의 물질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뚜렷하게 인식되는 영성/초월성 을 표현하려고 했다. 또한 야웨가 하늘에서 장막 또는 성전으로 내려오는 순간 초월적인 존재양식을 버리고 내재적인 존재양식인 카보드 (영광) 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유롭게 현존한다는 사제전승‘카보드 신학’ 역시 야웨를 특정 장소에 제한된 ‘붙박이형’ 神이 아닌 ‘역사적 사건’ 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는 신으로 이해함으로서 야웨의 주권과 자유를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물질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구약성서는 야웨를 전적으로 물질적인 존재로만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 점차 초월적이고 영적인 존재로 인식해가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야웨를 전적으로 영적인 존재로만 간주하거나 야웨의 물질성 자체를 부인하는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5.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물질성’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삶을 어떻게 주조해 왔으며, 오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이스라엘은 야웨를 몸을 가진 물질적 존재로 인식했기에 야웨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과 만나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은 야웨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쌓아가는 것을 통해서나 그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저장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야곱처럼 직접 씨름하며 얻어지는 실천적 지식이요, 섹스를 하듯 원초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씨름을 통해 야웨를 알아갔으며, 구약성서는 바로 이스라엘이 야웨와 온 몸으로 만나고 온 영혼으로 부딪히면서 야웨를 알아가는 과정을 풀어 놓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이 곳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그의 ‘목소리’를 들기 위해서 우리는  야곱처럼 야웨와 직접 몸부딪혀 그 뜨거운 심장을 느끼며 한판 씨름을 벌여야 하며, 구약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사건들로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어 야웨의 구원과 해방의 역사에 실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가장 물질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영적인 것이다!

6. ‘신의 몸 혹은 그 물질성’ 이라는 도발적인 주제나 ‘하나님’ 대신 굳이 ‘하느님’ 이라는 신명을 채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시각, 다른 전통, 다른 신학의 관점에 서서 구약성서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마도 몇몇 ‘믿음 좋은’ 사람들에게는 저자가 서 있는 자리나 그의 학문적 접근방식이 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이야말로 2000년 기독교 역사를 계승하는 ‘정통’ 이자 ‘적자’ 라고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은, 우리 대다수가 믿고 고백하는 ‘보수 정통 기독교’ 역시 19세기 미국이라는 제한된 시대와 장소 그리고 당대를 지배하던 특수한 철학사조 (스코틀랜드의 상식 철학) 의 영향 하에 발생한 지극히 미국적인 기독교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내 생각이 아니라 미국 최고의 복음주의 역사학자로 손꼽히는 마크 놀이나 조지 마스덴의 말이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이고 정죄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새디즘적 욕망을 이제는 좀 버리고 현대 구약신학의 거장들이 이룩한 풍성한 성취를 저자 자신의 창조적 사유와 잘 버무린 이 흥미진진한 책과 만나 부대끼고 씨름하면서 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성’의 축복을 즐겨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P.S. 저자인 곽건용 목사님은 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그가 한신으로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전도사로 봉사했던 합동측에 속한 용산의 한 교회가 바로 내가 지금까지 섬기고 있는 모교회이며, 나는 그가 교단과 교회를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제자 중  한 명이다. 잠시의 인연이었지만 그는 내게 ‘다른’ 세계와 ‘다른’ 신앙을 보여주었으며, ‘다른’ 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페북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고 좋은 책으로 교제할 수 있어 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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