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성신학자인 이 책의 저자 구미정은 신학이 명사일 수도 없고, 명사여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특정한 교리 또는 교조주의적인 개념을 암기하고 되새기는 것만이 신학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현현하셔서 (theophany)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 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규정하는 이러저러한 ‘명사’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은 말 그대로 이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님 Lord doing' 이며, 신학은 나/우리 또는 이 세상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신학이란 하나님을 위해(?) 철옹성과 같은 도그마의 성전을 짓고 그 안에 하나님을 유폐시킨 채 ‘부동의 동자 (unmoved mover)’ 로 모시다가 가끔 필요할 때 ‘종교 재판관’ 으로 호출해 내는 행위가 아니라, 저자의 말마따나 “살아 계신 하나님이 추고 계시는 우주적인 춤의 리듬을 타고 유연한 곡선의 스텝을 밟는 것”이자, “함께 놀자고 자꾸만 유혹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신나게 뛰어노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이든, 아퀴나스든, 루터든, 칼빈이든, 바르트든 그 어떤 위대한 신학자의 훌륭한 신학도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라면, 어자피 그분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신명나게 놀아재낀 한바탕 놀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유연하게 움직이는 ‘놀이’ 이기를 그치고 자신의 도그마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신학은 십중팔구 누군가를 살리는데 사용되기 보다는, 타자를 정죄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죽음의 본능(thanatos)' 혹은 ‘죽음애 (necrophilia)' 의 종으로 봉사하게 되는 법.
2.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놀이정신’ 으로 무장한 채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두 글자’ 로 된 단어들 가운데 12개 - 놀이, 희망, 용서, 가족, 생명, 잉여, 공감, 불안. 질투, 저항, 환대, 바보 -를 뽑은 후, 성서의 메시지와 다양한 인문학적 관점을 버무려 이 단어들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활동과 그에 담긴 뜻을 살아 있는 ‘동사’의 언어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신학과 인문학에서부터 대중가요나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들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신선하고 창조적인 ‘신학적’ 의미의 그물망을 직조해내는 그녀의 솜씨는 과연 ‘노는 게 젤좋아’ 라는 놀이로서의 신학, “뽀로로 신학”의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특별히 요즘 페북에서 지나친 진지함으로 물고기 (요나) 와 홍수 (노아) 에 대해 논쟁하고 계시는 분들이 이 책에 나오는 저자의 ‘놀이정신’을 좀 배우면 어떨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직접 들어보도록 한다.
본문읽기
“하위징아는 놀이의 반대편에 진지함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의 대립구도는 진지한 엄숙주의 대 가벼운 놀이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2008년 광우병 파동 때 촛불소녀들이 보여 준 발랄한 놀이정신은 그 자체가 문화충격이었다. 헌법 1조에 곡을 붙여서 집단 군무를 추는 그네들은 영락없는 호모 루덴스의 화신이었다. 태극기를 옷이나 액세서리처럼 몸에 두르고 거리를 질주하는 그네들을 보면서 국기를 모독한다고 혀를 차는 구세대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놀이하는 인간이기를 망각한 채 시종일관 진지하기만 할 때, 역사는 종종 야만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놀이)
“영화 <가족의 탄생>은 이른바 대안가족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것 같다. 고작 혈연 하나로 가족은 정상 아니면 비정상으로 가르는 시각은 얼마나 천박한 분류법인가. 피를 나누었다고, 혹은 결혼식을 치렀다고 저절로 가족이 되는 게 아니다. 가족의 형성에서 핏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존중, 연민, 돌봄과 같은 것들이다....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이 신의 손길로 지어진 것이라면, 가족의 범위는 한없이 확장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을 대할 때에도 신의 사랑으로 태어나 신의 보살핌을 받는 귀한 형제자매로 대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족)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준) 예수가 떠난 후, 그 집은 이른바 ‘가정교회’ 가 되었을 것이다. 회당에서 추방당한 예수처럼 갖가지 추방과 차별을 당하고 버림받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랑과 자비와 연대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시몬의 장모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볼일 없던, 쓸모없는 잉여인간 취급을 받던 할머니가 예수의 복음을 증언하고 전파하는 일꾼으로 거듭났다. 더 이상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자궁이 복음을 확대재상산하는 모태가 되었다.....결국 예수가 펼친 하나님나라 운동이란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재활용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장애인과 노인, 극빈자와 노숙인, 심지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까지 잉여인간 취급을 받아선 안 된다. 애당초 세상에 인간이 '쓰고 버릴‘ 수 있다는 생각 따위가 유통되어서는 곤란하다...” (잉여)
“프랑스의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우리가 타자의 고통에 볼모로 잡혀 있다고 말한다. 타자의 얼굴, 그것도 왕이나 지배자나 부자의 얼굴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 등 고통받는 사람들의 얼굴은 나 또는 주체가 아무리 모른 체하려고 해도 도저히 그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윤리를 ‘보는 것’ 과 연결시킨다. 여기서 ‘봄’ 은 타인을 보되 회피하지 않는 것, 다가가서 기꺼이 자비를 베푸는 행위를 포함한다. 그에 따르면 주체가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되는 길은 오직 타인에 대해 열려있고 타인을 위해 고통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길밖에 없다.....” (공감)
“인간의 법적 질서에서 벗어나 있고 신의 법적 질서에서도 배제되어 있는, 그렇기에 언제든 극악무도한 폭력에 노출된 존재가 바로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 혹은 벌거벗은 생명이다. 근대의 주권권력 자체는 벌거벗은 생명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원리에 기대어 있으며, 조에와 비오스, 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의 경계를 구획함으로서, 공동체 외부로 배제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에 복무한다.......핵심은 주도권을 악 또는 악한 자에게, 악한 체제에 넘겨주지 말라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힘이 있다면, 그 폭력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을 힘이 있다. 더 나아가 억눌리는 자. 약자. 소수자가, 예수가 알려준 방식대로 악의 실재를 폭로하고 규명함으로서 마침내 억압하는 자, 강자, 다수자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는 예수의 말씀을 ‘반항하고 저항하라’는 말로 환치해도 좋으리라......” (저항)
“나와 남 사이에 높다란 경계선을 긋고 나/우리 (나와 동류) 와 다른 남/그들에 대해 적의밖에 품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환대는 잃어버린 영성의 이름인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구원받은 인간의 첫 번째 표징이 바로 환대의 실천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낮선 바깥을 향해 자기 집/온 존재를 개방하는 일은 신의 자비에 몸을 던지는 모험이나 다름없다. 이 지점에서 환대는 단순히 나눔이나 친절이라는 인도적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하나님의 정의에 가 닿는다. 아울러 이 길만이 환대가 거래, 즉 순환적 경제라는 테두리에 긷히지 않는 유일한 길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면, 권리를 상실한 사람에게 ‘무조건’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자비가 환대의 밑절미여야 한다.....”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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