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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철학

쿤 & 포퍼,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장대익 지음, 김영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30.

 1.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현대과학은 인류의 삶을 짧은 기간에 혁명적으로 변화시킴으로서 지금까지 어떤 지식체계도 가지지 못했던 엄청난 힘을 보여주었으며, 그 결과 현대인에게 ‘과학적’이라는 말은 곧 ‘진리’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수많은 지식체계 (저자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 한의학, 창조과학 등) 가 자신이 ‘과학’임을 입증함으로서 권위를 획득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따라서 과학과 非과학을 가르는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 다른 말로 하면 이 책의 제목처럼 ‘과학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는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질문, ‘과학이란 무엇인가’ 를 놓고 칼 포퍼와 토마스 쿤으로 대표되는 20세기 과학철학자들이 벌인 치열한 논쟁을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는 좋은 과학철학 입문서이다.

 

2. 빈 학파로 대표되는 논리 실증주의 (1) 어떤 명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 명제의 진위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해야 하며, (2) 수학이나 논리학처럼 명제 자체 내에 그 진위가 포함되어 있는 분석명제나 자연과학적 진술처럼 경험적으로 진위를 입증할 수 있는 종합명제만이 검증이 가능한 ‘참된’ 지식의 형태이고 (3) 신학이나 형이상학의 명제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검증이 불가능하기에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진리의 영역에서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새로운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의 형태는 자연과학이며, 이러한 과학 지식은 관찰을 통해 자연 속의 규칙성을 발견하고 그것이 귀납추론에 의해 정식화되는 경우에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경험된 사실을 토대로 논리적 일반화를 시도하는 귀납추론은 그 경험의 사례가 아무리 많다 해도 사실을 입증하는데 충분치 않다는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지닌다.

 

3. 이러한 ‘귀납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칼 포퍼가 제시한 반증주의에 의하면 어떤 진술이 과학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이론의 입증 가능성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 즉 반증 가능성이며, 과학자란 반증 가능한 진술들을 던져 넣고 그것을 혹독하게 반증하려는 사람들이자 반증가능성이 더 높고 더 대담한 이론을 제시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사람들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과학 이론이란 주어진 문제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가설일 뿐이고, 오늘날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 이론들은 현재까지의 반증 시도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이론일 뿐이며, 만약 특정 이론을 반박하는 경험적 사례가 발견된다면 그 가설을 곧바로 폐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포퍼는 반증이 불가능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사이비 과학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반증주의 역시 과학자들이 실제로는 이 방법에 의해 과학활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과학사적 사실을 포함해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4.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고전적 저술로 20세기 지성사에 큰 영향을 끼친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은 과학이 누적적 지식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반대하여 과학의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뉴턴의 이론으로, 다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바뀌듯 개념적으로 서로 전혀 다른 지식체계가 혁명적으로 교체되는 과정인 소위 ‘과학혁명’을 통해 발전된다고 주장한다. 쿤에 의하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 같은 다른 학문의 영역과 달리 과학에서는 다수의 과학자들이 매우 놀랄만한 합의에 도달하는 시기가 존재하며, 이러한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포퍼의 주장과 달리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일종의 도그마에 해당하는 ‘패러다임’을 게임의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패러다임에 맞는 인상적인 사례인 범례 (exemplar) 의 수를 늘이는데만 집중한다. 그러나 기존의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증가하는 ‘변칙사례가 증가하는 위기의 시기’가 오면 전혀 다른 일군의 과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대안이 등장하며, 이 대안이 옛 패러다임이 해결하지 못한 골치 아픈 범례를 말끔히 해결하게 되면 과학자들이 이전 이론에서 새 이론으로 급격히 몰리는 ‘과학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쿤에 의하면 이러한 쏠림 현상은 대안적 패러다임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군중심리’ 나 ‘종교적 개종’에 비견될 수 있는 심리학적 동기가 그 원인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그의 방법론은 논리적 철학적 방법론이 우세했던 전통적인 과학철학을 역사적, 심리학적 영역으로 선회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5. 헝가리 태생의 과학철학자인 라카토시는 이러한 쿤과 포퍼의 이론을 절충하여 ‘연구 프로그램  (methodology of research program)’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라카토시에 의하면 '연구 프로그램' 은 일련의 이론들의 집합으로 ‘견고한 핵 (hard core)’라는 핵심 이론과 ‘보호대 (protective belt)’라는 여러 유형의 보조 가설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변칙사례가 생기면 ‘견고한 핵’은 건드리지 않은 채 ‘보조가설’들을 이리저리 수정해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렇게 수정된 연구 프로그램이 경험적으로 입증되거나 새로운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 프로그램은 과학적 혹은 진보적 프로그램이 되어 과학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며, 그렇지 못한 경우 퇴행적인 프로그램이 되어 사이비 과학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한다. 


6. 또한 기인의 풍모를 지녔던 빈 출생의 과학철학자 파이어아벤트는 위대한 과학자들은 특정한 방법론을 사용한 적이 결코 없으며 오히려 기존의 방법론들을 어겼기 때문에 과학의 대가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과학 활동에 통용될 수 있는 특정한 과학 방법론이란 없다는 소위 ‘인식론적 아나키즘’을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 과학활동의 유일한 법칙은 ‘네 맘대로 하세요 (Anything goes!)' 이며, 과학은 수많은 지식체계의 하나일 뿐 우월한 인식론적 특권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론적 아나키즘에 더해 현대의 과학사회학자들은 사회 구성주의에 입각하여 과학적 사실들은 과학공동체에 의해 ‘구성' 되는 것이며, 종종 벌어지는 과학 논쟁은 흔히 당사자들간의 '사회적 협상'의 결과로 종결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7. 저자는 과학의 과정이 포퍼를 비롯한 전통적 과학철학자들의 주장처럼 단일한 합리적 절차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파이어아벤트나 사회 구성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무질서하거나 과학자 공동체간의 타협의 산물인 것도 아니며, “사회적 심리적 논리적 경험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인 것 같다고 결론짓는다. 어쨌든 자연과학적 지식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심지어는 사회적 구성물일 가능성도 있다는 과학철학이나 과학사회학의 목소리를 충분히 경청하되, “합리적인 하나님이 합리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였으며 따라서 합리적 인간은 세계를 합리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는 프란시스 쉐퍼의 말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이라는 책을 열심히 탐구하여 그 가운데 드러나는 창조세계의 경이와 창조주의 자취를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자연과학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p.s 이 책의 말미에는 이 책에서 소개한 과학철학자들이 지적설계론에 대해 벌이는 흥미로운 가상 대화가 실려 있다. 저자는 포퍼라면 지적설계론은 기본적으로 반증할 만한 경험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아 반증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과학이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며, 은 지적 설계론 자체가 자신의 패러다임에 근거한 인상적인 문제 해결 사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내용 없고 무능한 이론이기에 과학이론일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라카토시는 지적 설계론이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기는커녕 자신에게 어디에 구멍이 나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론이기에 현재 시점에서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오직 ‘제 멋대로 하라’는 아나키즘적 인식론을 주장하는 파이어아벤트만이 지적설계론을 기존 진화론의 훌륭한 대항마로 인정할 것이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과연 창조과학자나 지적설계론자들이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 그들은 과연 파이어아벤트에게 받은 '인정'을 기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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