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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철학

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천년의 상상 펴냄)

by 서음인 2016. 5. 28.

1. 오늘날 주로 수필을 가리키는 ‘에세이’ 라는 말은 원래 ‘논문’까지를 포괄하는 폭넓은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고 한다. 저자인 진중권은 이 책에 묶인 “논문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듯한” 글들이야말로, 바로 이런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직까지는 근대 과학주의의 영향으로 ‘논문’이 학적 글쓰기의 배타적 표준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인문학의 미래는 철학적 논문과 문학적 수필이 구별되지 않는 ‘에세이’ 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2.. 진중권은 “인문학이란 결국 그 시대에 적합한 유형의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사회적 기획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16세기에 인쇄술과 함께 열린 문자문화가 합리적 ‘이성’의 기획이었다면 우리 시대의 영상문화는 ‘상상력’의 기획이며, 문자문화의 인문학이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로 만들려 했다면 영상문화의 인문학은 인간을 ‘창의적 존재’로 진화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은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문학이 영상과 문자가 함께 하고, 기술(description) 과 상상(imagination) 이 어우러지며, 철학과 문학의 형식이 결합된, 이 책에서 자신이 실험하고 있는 ‘에세이 쓰기(essayistics)' 라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필요로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에세이 쓰기(essayistics)’로서의 철학은 모든 지식을 하나의 체계로 포괄하게 해주는 절대적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세계의 상을 전달해 주는 것은 서로 어긋나거나 심지어 모순되는 다수의 관점들의 몽타주라는 특정한 진리관(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이 책을 구성하는 43개의 철학적 에세이 하나하나는 몽타주 속으로 짜여 들어가는 조각에 비유할 수 있으며, 그 몽타주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라기보다는 한 장의 ‘지도’, 그것도 기억해야 할 부분만을 표기한 한 장의 약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마따나 철학적 글쓰기란 ‘기술(description)' 보다는 ’매핑(mapping)’이며, '에세이 쓰기'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일종의 지도학(cartography) 이 될 것이다.

 

4.. 진중권이 작성한 이 ‘지도’에 담긴 총 43편의 비교적 짦은 ‘에세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들뢰즈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 현자(賢者) 들을 자유로이 호출하여 세상을 보는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진리의 ‘파편’들을 보여준다. 아무리 복잡한 현상이나 사상도 명확하고 알기 쉽게 바꾸는 ‘마이다스의 손’ 진중권의 글을 읽는 일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가끔 지적 황홀경(ecstasy) 을 느끼게 해 주기도 한다.

 

5. 혹시 이 책이 보여주는 ‘포스트모던’한 진리관이 불편한 분들 - 특히 이미 주어져 있는 '보수-정통' 신앙을 확고히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신학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 - 이 계시다면, 이 진리관에 대해 흥분하거나 정죄의 칼을 휘두르기에 앞서 자신이 수호하려는 그 ‘진리(dogma)’가 진중권이 말하는 합리적 이성의 기획, 즉 ‘근대성’ 이라는 토대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이 소유한 ‘절대적 진리’와 인간에게 주어진 ‘계시’를 유한하고 타락한 인간이 완벽하고 최종적인 형태로 이해할 수 있는지 (혹은 '진리' 혹은 '계시'의 이해를 독점하는 단 한 가지 형태의 신학이 존재할 수 있는지) 에 대해서도 한번쯤  따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죄 많고 불완전한 존재’ 인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진리란 어자피 ‘파편’ 에 불과하며, 그러한 인간이 지상에서 행하는 신학이란 진리를 완벽히 재현해 낸 한 폭의 ‘그림’ 이라기보다는,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 혹은 진중권의 말마따나 진리를 찾는 순례길을 안내하는  ‘지도’ 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심지어 더 '복음적’ 인 이해가 아닐까? 절대적 진리를 계시한다는 성경, 그것도 더 새로운 약속인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했던 바울도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목차

                                                                                                                        

머리말

1부 삶을 예술로, 존재의 미학

01 델포이의 신탁 - 너 자신을 배려하라

02 창조적 개새끼 - 촌스러움을 경멸하라

03 냉담한 멋쟁이 - 나는 내 자신으로 만족한다

04 도시의 만보객 - 뜨거운 참여와 차가운 관찰

2부 미디어

05 커뮤니케이션의 편향 - 매체가 문명을 결정한다

06 토탈 신파 - 감정과잉의 오류

07 언어의 착취 - 자본주의 시장 속의 언어

08 희망버스 - 네트워크를 물질화하라

3부 현실과 허구

09 뮈토스와 로고스 - 과학 이후의 이야기

10 트루맛 쇼 - 사실은 만들어진다

11 재판이냐 개판이냐 - 몽타주의 마술

4부 사실과 믿음

12 데카르트의 고독 - 모든 것을 의심하라

13 눈에 뵈는 아무 증거 없어도 - 신앙주의에 관하여

14 오컴의 면도날 - 진리는 단순하다

15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 수사와 진리의 싸움

16 수사학의 전쟁- 보수와 진보의 수사학

5부 정체성

17 그분이 나를 부른다 - 호명이라는 강박

18 위대한 계시 - 성녀와 마녀 사이에서

19 전향의 정치학 - 디지털 시대의 볼셰비키들

20 부역자 - 어설픈 이념의 낙인

21 공약의 부담 - 말에 따르는 책임

6부 익숙한 낯섦

22 시적 순간 - 낯설게 하기

23 십자가에 못 박힌 욕망 -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

24 총을 든 베르세르커 - 질주하는 광기

25 냉장고 속의 독재자 - 정치로서 사체 공시

7부 미의 정치성

26 미적 자본 - 아름다움 앞에서 법률은 효력을 잃는다

27 거울과 선풍기 - 거울의 영원함을 위하여

29 메스를 든 피디아스 - 개성적 아름다움의 파괴

29 신체는 전쟁터 - 미용성형의 정치학

8부 존재에서 생성으로

30 발롯 체험 - 기관 없는 신체의 창조적 역행

31 냄새 나는 그림 - 후각적 공감각에 관하여

32 감각의 히스테리 - 말미잘의 촉수처럼 민감한

33 얼굴은 풍경이다 - 고흐의 자화상

9부 예술의 진리

34 견자의 편지 - 선포로서의 진리

35 그리드 - 우주의 자궁

36 파편의 미학 - 터치(touch)는 감동(touch)이다

37 아레스토 모멘툼! - 순간아, 멈추어라

38 차이와 반복 - 반복가능성에 관하여

39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비독서의 미덕

10부 디지털 테크놀로지

40 실물 크기의 지도 - 지도와 제국주의

41 디지털의 바틀비 - 컴퓨터 그래픽의 정치학

42 기술적 영상 - 문자와 숫자로 그린 그림들

43 기계와 생명 - 칸딘스키와 유사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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