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집 앞에 있는 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초판이 나온지 7개월만인 2010년 1월 22일이었고, 이미 그때 이 책은 117쇄를 돌파하고 있었다. 물론 독자의 인내력을 극한까지 시험하는 유럽의 일부 인문학 저자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일반 독자가 읽기에 만만하지만은 않은 이 책이 짧은 시간내에 슈퍼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것 자체가 정의에 굶주린 한국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2.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의 상이한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정의란 행복의 극대화, 즉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의란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며, 마지막으로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제러미 벤담이나 J.S.밀에 의해 옹호되고 공리주의로 알려진 첫 번째 입장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일체의 것을 가리키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옳은 일(정의) 라고 주장한다. 소위 말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야말로 선이요 정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사실상 현대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의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입장이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들고, 인간 행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질적 차이를 무시한 결과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민주주의 국가의 토대가 될 수 없다.
4-1. 두 번째 견해에 의하면 정의란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 중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나는 국가나 공동체가 아닌 나 자신에게 속한다'는 전제 하에, 규제 없는 자유시장을 옹호하고 온정주의나 도덕법,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반대하며, 국가는 계약을 집행하고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역할만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최소국가론).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심지어는 살인이나 식인 행위도 자유로운 개인 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졌다면 처벌할 근거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4-2.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는 견해 중 두 번째는 <정의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존 롤스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강조하며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라고 불린다. 롤스는 원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사회 내에서 자신의 상황과 이해관계를 알 수 없는 '무지의 베일'을 쓴 상태를 가정한 후 (원초적 입장 original position), 그들이 사회 정의를 위해 어떤 원칙을 선택하게 될지 질문한다(정의원칙에 대한 가언합의).
그리고 그는 만약 우리가 이러한 '원초적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1) 언론이나 종교의 자유 같은 정치적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보장되도록 할 것이며 (제1 정의 원칙 - 자유우선원칙) (2) 경제 사회적 불평등은 ① 모든 사회 성원에서 직무와 직위의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며 ② 사회 구성원 중 최소 수혜자에게 혜택이 가장 높은쪽으로 불평등이 조정되는 경우에만 용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제2 정의원칙 - 평등제한 원칙, 이중에서도 ② 는 차등원칙 혹은 최소극대화 원리 the maximin principle 라고 불린다). 따라서 롤스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재능 있는 사람을 격려해 그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둬들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3.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권리를 중시하는 이 두 견해는 존중받아야 할 할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간에 이견이 있지만, 개인의 권리를 진지하게 다루고 정의는 공리나 계산 이상이라는 것에 동의함으로서 공리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이론은 공히 칸트나 롤스를 따라 권리를 선보다 앞세우며, 선한 삶이나 윤리적 가치판단과 같은 목적론적 원칙이 정의의 문제에 개입할 때 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위태로워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이론들의 지지자들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와 절차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일 뿐, 정의의 문제에 개인의 윤리적 종교적 취향이나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견해가 개입되어서는 안 되며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롤스에 의하면 정의란 개인의 품성과 도덕적 가치 그리고 덕(virtue)에 관한 문제라기 보다는, 공정한 사회제도의 구축을 위한 원칙에 관한 문제다 (행위원칙 vs 행위주체) .
5-1. 이러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견해에 대해 공동체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저자는 때로 도덕적 가치나 삶의 의미, 공공선과 같은 목적론적 문제들을 다루지 않고서는 정의를 규정하기가 불가능하기에 선택의 자유는 공정한 조건과 절차가 보장되는 경우에도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결국 정의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개인과 공동체의 미덕을 키우고, 삶의 의미를 함께 논의하며,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덕 윤리학 Virtue Ethics).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하면 구체적인 상황에서 유덕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윤리적 가치나 관행이 '원초적 입장'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한 불편부당한 관점보다 더 중요하기에 '사람의 덕과 공동체의 가치'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객관적 정의'란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정의에 대한 논쟁은 가치와 미덕(virtue) 그리고 좋은 삶의 본질(텔로스) 에 관한 논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
5-2. 공동체주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알레스데어 메킨타이어에 따르면 우리는 서구 근대성의 이상이 만들어낸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자아’가 아닌 역사나 공동체와 같은 더 큰 맥락 가운데 놓여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삶을 통합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행위 주체' 혹은 ‘서사적 존재’이기에 ‘나는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은 잘못이며, 누구든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정의를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의무 이외에 내가 속한 특정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무가 존재하며, 거기에는 같은 공동체 사람들에 대한 의무뿐 아니라 내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예를 들면 독일인이 유대인에 대해,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6. 저자가 내린 결론을 정리하자면 정의란 다수의 공리추구 과정이거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윤리적, 종교적 판단을 개입시켜 좋은 삶을 만들어가고 공공선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공동체주의). 그러나 가뜩이나 기득권이 공공선의 이름을 빌어 온갖 왜곡된 이념적 종교적 윤리적 잣대로 정의와 부정의를 함부로 재단하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과잉서사’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더 시급한 것은 존 롤스를 따라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 자아’를 복권시키는 일이 아닐까? 어찌 되었던 어떤 페친의 말마따나 이번 대선(2012년 박근혜씨가 당선된)이 보여 준 한국사회의 모습이 ‘헌법은 관습 밑에, 관습은 안정희구 논리 밑에, 안정희구 논리는 부동산 경기 밑에’ 깔린 형국이라면 헌법 맨 아래 어딘가에 깔려 압사하기 일보 직전일 정의에 대한 희구와 갈망은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더 강렬해지지 않을까 싶다.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칠 것이다...."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정의란 무엇인가
'책 - 인문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쿤 & 포퍼,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장대익 지음, 김영사 펴냄) (2) | 2016.05.30 |
---|---|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II (칼 포퍼 지음, 민음사 펴냄), 칼 포퍼 -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칼 포퍼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0) | 2016.05.28 |
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천년의 상상 펴냄) (0) | 2016.05.28 |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이진경 외 지음, 문학과 경계 펴냄) (0) | 2016.05.28 |
처음읽는 영미 현대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동녘 펴냄),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레이 몽크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비트겐슈타인 (존 히튼 지음, 이두글방 펴냄) (0) | 2016.05.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