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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철학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이진경 외 지음, 문학과 경계 펴냄)

by 서음인 2016. 5. 28.

이 책은 "은하철도 999", " 공각기동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원령공주" 등 이제는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열두 편의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해설서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애니매이션 해설서가 아니다. 이 책의  진정한 면모는 저자들의 면면을 이해해야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대표저자인 이진경은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일개 대학생 신분으로 저술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라는 책을 통해, 80년대 운동권을 뜨겁게 달구었다는 그 유명한 "사회구성체논쟁" 을 촉발한 장본인으로 (386세대라면 아마도 NL 이니 PD 니 하는 이야기들을 귓전으로라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감옥에서 프랑스 철학자인 질 들뢰즈를 만난 후 그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마르크스와 결별하고, 현재는 이 책의 다른 저자들과 함께 "수유+너머" 라는 연구자 집단을 결성하여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한 지적 탐색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애니매이션이라는 텍스트를 읽어 내는 저자들의 사유는 철저하게 스피노자에서 니체로, 푸코로, 궁극적으로는 질 들뢰즈로 이어지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계보에 속해 있으며, 사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일본 애니매이션들을 매개로 이 흐름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는 들뢰즈 사상을 풀어주는 해설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앞에서 말한 4명의 철학자에 대해 사전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훨씬 이해가 빠르겠지만, 다행히 그들을 전혀 모르더라도 이 책에 다루는 애니메이션들을 본 적이 있다면 저자들의 주장을 이해하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사실 대다수의 일본 애니매이션들이나 들뢰즈의 생성과 변이의 철학이 근거하고 있는 세계관은, 범신론이면서 상대적인 진리관에 근거하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일종으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유신론의 세계관과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합리적 이성의 지배가 인간을 해방시키고 유토피아를 가져올 수 있다는 “근대성”과 “합리성”의 기획이 인간의 해방을 가져오기는커녕 더욱더 정교한 미시권력의 감시장치로 현대인을 얽어매는 또 다른 속박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파괴로 작금의 환경위기라는 재앙을 가져왔다는 그들의 문제제기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또한 끊임없는 ‘생성’과 ‘변환’, 그리고 ‘탈주’ 에의 욕망을 강조하는 그들의 주장은, 복음주의 기독교= 보수라는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기독교란 과연 무엇인지 한번쯤 돌아보게 한다. 과연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여기가 좋사오니” 를 외치며 변화산에 머무르기를 간청하는 베드로의 자리인가, 아니면 “유대인을 얻기 위해 유대인같이, 헬라인을 얻기 위해 헬라인같이...”되기를 호소하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도,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노라”고 고백하는 사도바울의 자리인가?

 

목차

                                                                                    

1. 은하철도 999 - 인간과 기계 사이를 달리는 위태로운 여행의 역설들

2. 공각기동대 - 신체는 어떻게 자신을 변이 시켰는가

3. 메모리스 - 기억의 세가지 시제

4.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에코소피아'를 향한 대서사시

5. 평성 너구리 전쟁 폼포코 - 인간, 그가 '잊고' '있는' 것에 대하여 

6. 노인 Z - 전쟁기계는 사랑 기계인가

7. 블랙 잭 - 초인류는 어떻게 인간을 넘어서고자 했는가

8. 아바론 - 미래는 어떻게 현재가 되는가

9. 신세기 에반겔리온 - 신세기의 복음, '무아'의 존재론

10. 원령공주와 생태주의 - 생을 위해 총체를 바뀌는 기예

11. 인랑 - '붐비는 고독'을 품지 못한 슬픈 전쟁 기계

12. 프린스 앤 프린세스 - 60초를 위한 여섯 개의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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