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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철학

환대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 지음, 남수인 옮김, 동문선 펴냄)

by 서음인 2021. 3. 9.

『환대에 대하여』는 우리에게 해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자크 데리다가 ‘환대’와 ‘적의’라는 주제로 행한 두 번의 강연을 정리한 내용에, 그의 강연을 듣고 책으로 출판할 것을 권유한 철학자 안 뒤푸르망텔의 서문을 붙여 펴낸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환대의 필요성과 불가능성, 무조건적 환대와 계약적 환대, 환대의 절대적 ‘법’과 환대의 ‘법들’과 같이 모순적이면서도 분리 불가능한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 환대가 가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강남순, 새물결플러스)및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변광배, 프로네시스) 같은 책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난해한 책을 어설프게나마 이해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해한 부분들을 간략히 요약하고 간단한 단상을 덧붙인다.

 

이방인과 절대타자    이방인은 무엇보다 환대의 의무와 한계, 기준이 명시되어 있는 법(환대의 법들) 앞에서 이방인이며, 이러한 환대의 법들은 가부장적이며 남성 중심적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그 존재만으로 부성 로고스의 독단주의에 이의를 제기하며, 아버지의 권위, 집주인의 권위, 환대 역량의 권한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존재다. 그들은 일정한 권리를 가질 수 있지만, 이는 그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고 일정한 가족적 민족적 지위를 지니며 제한적이나마 의무와 책임을 가질 수 있는 주체일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난민이나 무국적자와 같은 익명의 도래자, 이름도 성도 가족도 사회적 위상도 없어서 이방인으로도 취급되지 못하고 절대적 타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조건적’ 환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무조건적(절대적) 환대와 조건부(계약적) 환대    이러한 절대적 타자에게 제공되어야 하는 환대는 ‘절대적’ 혹은 ‘무조건적 환대’이며, 이는 권리/계약에 의해 규정되는 조건부(계약적) 환대와 단절할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무조건적 환대는 타자가 이름이나 신분을 밝히기 전에, 타자가 법적 주체이기 전에, 그리고 가족이나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불려질 수 없는 경우에라도, 그들을 물음이나 조건 없이 맞이하고 내 집을 개방하며 우리 안에 머물 장소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성을 가진, 이방이라는 사회적 위상을 가진)에게 뿐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미지의 절대 타자에게 “당신이 누구이든, 당신의 이름이나 언어가 무엇이든, 당신이 남자든 여자든, 당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짐승이든, 신이든, 오라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환대의 주체와 객체     절대적 환대는 주인이 주체가 되는 ‘초대의 환대’가 아니라 예상치 않은 방문과 기대치 않은 방문자를 아무 조건 없이 맞이하고 환영하는 ‘방문의 환대’이다. 더 나아가 이 환대는 도래자에게 “마치 구원자나 해방자라도 되듯 ... 나를 점령하고 내 안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한다. 손님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 손님이 되는 이러한 치환들은 마치 오이디푸스가 비밀을 빌미로 테세우스를 인질로 만들듯 서로를 상대방의 인질로 만든다. 절대적 환대란 주인과 도래자의 경계가 사리지는 곳에서, 그리고 확고한 거처에서부터가 아니라 자기-집 부재의 경험에서 나올 수 있다.

 

환대의 ‘법’과 ‘법들’     절대적인 환대의 ‘법’(La Loi)은 도래자에게 자기-집을 포함한 우리 전체를 주되, 이름도 묻지 않고 대가도 요구하지 말고 최소의 조건도 내세우지 않기를 요구하는 초시간적, 초공간적, 무제한적, 무조건적인 법이다. 그러나 환대의 ‘법들’(des lois)은 특정 시공간에 자리한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무조건적인 환대의 ‘법’을 어떻게 실천할지를 규정하는 조건적인 권리들과 의무들로 구성된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환대의 ‘법’은 정언적 명령이나 의무가 없는 "법 없는 법"이며, 환대의 ‘법들’ 위에 ‘법들’ 밖에 존재하기에 위법적이고 침범적이다. 환대의 두 법 체제인 유일무이한 ‘법’과 다양한 ‘법들’은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지만 분리가 불가능하며, 환대의 무조건적인 법은 본래대로의 법이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부패시키며 타락시키기도 하는 환대의 법들을 필요로 한다.

 

환대의 필요성과 불가능성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환대는 필요하지만 불가능하다. 강남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① 환대 베풀기란 주인과 손님의 경계를 긋는 행위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위에서 언급한 무조건적 환대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다. ② 구체적 사건으로의 환대나 특정한 환대의 법들은 결코 환대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특정한 인간이나 공동체가 환대의 모든 차원을 알고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③ 주인이 손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포용과 배제의 범주가 설정되기에, 무조건적 환대를 위해서는 손님에 대해 ‘알지 못함’의 차원을 끊임없이 남겨놓아야 한다. ④ 환대는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앞으로 다가오는 사건이기에 언제나, 누가 그리고 무엇이 올지 모르는 ‘아직 아님’의 차원이 존재한다. ⑤ 공권력이 사적인 영역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국가가 규정하는 환대의 범위 밖에서 개인적인 결단이나 종교적 신념에 의한 환대를 베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인적 단상

 

데리다에 따르면 환대는 필요하나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환대는 무조건적 환대이지만, 우리는 결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환대에 도달할 수 없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구체적 현실 속에서 특정한 ‘환대들’을 베풀거나 특수한 ‘환대의 법들’을 제정한다 해도, 그들이 환대의 모든 시간적 공간적 차원을 포괄하거나 도래했거나 도래할 모든 타자를 완전히 포용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기표가 언제나 궁극적인 기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미끄러지듯', 개별적 환대의 '행위들'이나 '법들' 역시 절대적 환대에 도달하지 못한 채 언제나 그 완성이 ‘연기’ 또는 ‘지연’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는 환대가 “걷고 있는 인간에게 건네진” 질문이자 과제라는 뜻이다. 환대란 끊임없이 경계를 넘는 사람, 성숙을 항한 모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 ‘나(우리)의 환대’라는 자신의 껍질을 계속 탈피해가는 사람의 것이다. 그것이 종교 경전의 문자든, 전통적 도덕의 가르침이든, 특정 이데올로기의 도그마든, 특정한 시공간에 자리했던 환대의 ‘사례들’이나 ‘법들’에서 멈춰버린 사람들은, 결국 한때 유용했던 ‘환대’의 화석으로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도래한 타자를 구별 짓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환대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데라다의 말대로 환대란 “해체의 전형 또는 이름”이 된다. 우리가 절대적인 환대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환대들’이나 ‘구체적인 환대의 법들’을 지속적으로 해체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이 ‘해체'의 목적이 파괴 자체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관심이며, 따라서 최후까지 해체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의‘라고 강조한다. 이는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의 궁극적 지향이 결국 정의를 향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대는 정의의 또 다른 이름”이며, “해체 없이 환대 없고, 환대 없이 정의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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