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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철학

윤리와 무한 - 필립 네모와의 대화 (에마뉘엘 레비나스 지음, 김동규 옮김, 도서출판 100 펴냄)

by 서음인 2021. 3. 31.

『윤리와 무한』은 “타인의 얼굴”이라는 화두를 들고 서양 철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해 왔던 존재론에 맞서는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 프랑스의 철학자인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1981년 2월부터 3월 사이에 프랑스 공영 라디오 채널을 통해 방송으로 대담한 내용을 정리해 펴낸 책이다. 번역자인 김동규 서강대학교 연구교수는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레비나스의 철학 사상 전반을 비교적 쉽고 친숙한 언어로 접할 수 있는 이 책이 레비나스에 처음 입문하는 용도로뿐 아니라 말년에 접어든 그의 원숙한 사상을 회고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말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레비나스의 무르익은 사상 전반을 본인의 생생한 육성으로 직접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번역자의 달콤한(?) 소개와 달리 입문자가 이 책을 통해 레비나스 사상의 윤곽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시간과 타자』 (레비나스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의 말미에 붙은 번역자 강영안 교수의 ‘해설 - 레비나스의 철학’이나, 손봉호 교수의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성광문화사 펴냄)에 들어 있는 ‘레비나스의 철학’과 같은 짤막한 소개글들을 먼저 읽은 후 이 책을 펼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 소개한 두 편의 글을 주로 참조하고 이 책의 내용을 보충해 개인적으로 이해한 레비나스 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한 후 짧은 단상을 덧붙인다.

 

존재론과 평화의 철학    레비나스는 지금까지의 서양철학은 존재론이었으며, 이는 하나의 이념으로 전체를 통일하고 포괄하고자 했던 전쟁의 철학, 전체성의 철학이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것을 비판하는 자신의 철학은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윤리의 철학, 평화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존재론을 주체중심의 철학, 사유중심의 철학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서양의 존재론이 외재적인 존재에 대한 이론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외재적 존재를 이해하는 주체의 사유와 의식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저 있음’(il-y-a)    만물은 어떤 체계에 속하거나 의미를 부여받지 않더라도 ‘그냥’ 존재하며, 이렇게 어떤 매개도 없이 비인칭적으로 현존하는 원초적인 존재형태를 레비나스는 ‘그저 있음’(il-y-a) 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무력감과 비의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저 있음’을 ‘불면’을 통해 경험하게 되며, 이에서 벗어난 의미 있고 독립적인 자아의 출현은 역설적으로 ’잠‘을 통해 가능하다. 자아는 자고 일어나면서 새로 시작되는 의식의 활동을 통해 ‘그저 있음’의 숙명을 망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새롭고 의미 있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향유와 잠/거주/노동/인식    인간의 세계에 대한 원초적 관계는 하이데거의 ‘염려’가 아니라 즐김과 누림, 곧 ‘향유’ (jouissance)다. 이러한 향유는 우리의 욕구를 일시적으로 충족시켜 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주변 세계의 익명성과 무규정성으로 환원시키려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인간은 자신의 독립성과 자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 환경과의 접촉을 단절한 채 자신의 공간에 ‘거주’하며, ‘노동’과 ‘인식’을 통해 환경 세계가 지닌 무규정성과 익명성을 해체하고 사물에 의미와 기능을 부여한다. ‘잠’과 ‘거주’는 인간이 자신을 환경과 분리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방식이며, ‘노동’과 ‘인식’은 인간이 타자와 다른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해 그들을 자기에게로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전체성과 타자    ‘전체성’은 인간이 자기실현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체계이자 타인과 함께 구축하는 세계 질서다. 여기서 인간은 노동과 인식을 통해 동일자의 원 속에서 자기를 확장해 나가지만, 이는 세계 지평의 한계 내에 제한되며 죽음과 함께 끝나기 때문에 삶에 궁극적인 의미를 줄 수 없다. 이에 반해 ‘무한’은 타자와의 마주함을 통해 우리 존재의 지평 밖에서 들어오며, 노동이나 인식을 통해 동일자의 원 속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무한의 차원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저 있음’와 공통점을 지니지만, 구체적인 현존과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호소하는 ‘타인’과 관계한다는 점에서는 구별된다.

 

타인의 얼굴 I    타인의 존재는 완전한 초월성과 외재성, 그리고 무한성을 지녔기에 어떤 체계로도 환원이 불가능한 ‘얼굴’로 나타나며, 우리는 이러한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인 ‘환대로서의 주체성’을 얻게 된다. 이는 타인이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내면성의 닫힌 세계 속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이며, 진정한 주체성이란 타인의 존재를 내 안에 받아들이고 타인과 윤리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요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하며,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내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이야말로 주체성의 본질적인 구조다.

 

타인의 얼굴  II    ‘얼굴’은 타인의 무력함과 주인됨을 동시에 계시한다.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한 타인은, 상처받을 가능성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정의로움을 요구하는 윤리적 명령이 된다.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라 나의 상위에 있는 절대자로 나타나며, 방어할 수 없는 타인의 얼굴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넘어 상호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타인을 위해 목숨을 대가로 치르는 손해를 감수할 것까지 요구한다. 이러한 타인과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야말로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

 

죽음과 타인    살인이요 가해요 폭력이며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인 죽음은 타인의 현현과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계산할 수 없는 미래이기에,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인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타자는 그의 초월성 때문에 죽음처럼 나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무력성 때문에 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다. 타인을 선대할 때 나의 존재는 나에게서 타인의 미래로 그 중심이 옮겨지고, 이 때 죽음을 향한 나의 존재는 타인을 위한 존재로 바뀌며, 자기중심성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러한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선행을 통해서 사라지게 된다.

 

사랑과 부성/자식성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를 통한 수태를 통해 시간은 무한성의 차원, 절대적 미래, 폭력과 죽음에 맞서는 무한한 잉여를 얻을 수 있다. 에로스는 여성적인 것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는 감추어진 것을 찾으려는 몸짓이고, 타자성을 그 본질로 하는 여자는 남자에게 이 감추어진 것을 보여주며, 이는 아이의 출산을 통해 마침내 익명성에서 해방되어 구체적인 이름과 얼굴을 가지게 된다. 부성(父性)이란 전적으로 타인이지만 동시에 나인 낮선 타인과의 관계로 혈연관계 없이도 가능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타자의 가능성을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성서와 철학    타인에 대한 무제한적 책임이라는 윤리적 증언은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주제이며, 이는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타인의 책임으로서의 인간의 인간성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주체 혹은 동일자가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한 동일자 안의 타자는 어떤 주체도 어떤 현재도 가능하지 않은 무한을 증언한다. 참된 인간의 삶은 삶과 존재의 동질성에 만족하며 머무르지 않고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늘 미망에서 깨어나는 삶이다.

 

개인적 단상     레비나스는 우리가 어떤 범주로도 환원 불가능한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영접하며 환대하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주체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환대로서의 주체성) 그리고 소수자와 약자의 얼굴을 한 타인은 상위에 있는 절대자로서 우리에게 타인에 대한 무한책임이라는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 있으며, 참된 삶의 방식은 무한을 증언하는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늘 미망에서 깨어나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윤리적 명령과 삶의 방식이야말로 성서의 중심 메시지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생각을 살피고 있노라니 환대는 자신들이 규정한 자기동일성의 체계 안에 포섭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야 하고, 무한을 증언하기 위해 타자의 얼굴을 짓밟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참된 신앙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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