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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학

생명의 경외 - A. 쉬바이처 명설교 모음 (A. 쉬바이처 지음, 종로서적 펴냄)

by 서음인 2016. 6. 2.

이 책은 역사적 예수 연구로 유명한 신약신학자이자 중앙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의료 선교사로 평생 헌신한 ‘밀림의 성자’ 알버트 쉬바이처 (Albert Schweitzer 1875 -1965) 의 설교집이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에서 출판된 이 책을 산 것이 1990년대 중반경이니 읽기 시작하는 데만 장장 20여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지배적 견해였던 비종말이고 윤리적인 역사적 예수상을 거부한 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철저하게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지평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예수의 그 기대는 결국 역사 속에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역사적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의 영이 그분으로부터 나와서 사람들의 영 안에 새롭게 영향을 미쳐 새로운 존재로 사로잡음으로서 세계를 극복하고 있다”고 설파했다. 

이 위대한 인물의 설교집을 읽고 있노라면 여러 의심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깊이 사로잡혀 있으며 그의 외면적 사회 봉사의 삶은 그의 내면적인 영성이라는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복음주의 저술가 엘톤 트루블러드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트루블러드의 말을 한번 더 인용하자면 “우리는 그의 정통성(Orthodoxy) 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의 편집자인 울리히 노이엔슈반델은 쉬바이처의 설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경건과 신앙의 중심에 두었던 쉬바이처는 설교의 본문으로 신약성서, 그중에서도 특히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을 선호했다. (2) 그는 교리나 교훈 혹은 도덕이 아닌 복음을 설교했으며, 위협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닌 돕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설교할 때는 죄인이 다른 죄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체험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3) 그의 설교의 언어는 매우 단순하고 시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적이고 일상생활에서 관찰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4) 특별히 그의 강림절 성탄절 및 고난 주간의 설교들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 임재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교의적 용어로 말하지 않으며, 고백적이고 체험적이면서도 주님의 임재를 깊이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마지막으로 개인적 견해 한 가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는 어디일까? 기도? 명상? 설교? 성경연구? 신학? 물론 다 맞는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의 제자도를 실천(Orthopraxis)하는 자리야말로 참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가장 좋은 자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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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용기 中 (예수님께 파송받은 70인의 제자들이) 택함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그리고 싸웠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간의 삶에 드리운 위대한 비밀은 명상이나 지성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 보다 고차원적 깨달음을 오로지 행동과 실천에서만 흘러나온다. 이런 고차원적 깨달음에는 지혜있는 자와 소박한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단지 소박한 자가 행동하였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에게 감추어진 통찰을 부여받았을 따름이다.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격언의 말씀 이상은 얻어낼 수 없다. 행동하는 사람만이 높은 지혜를 획득할 수 있고 또 그들만이 인생의 싸움과 승리를 알게 된다.

삶 속에 계신 그리스도 中 나는 항상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모든 것이 붕괴된다고 해도 한 가지만은 존속할 것이다. 우리 연약하고 가련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과업을 계속하는 한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사상, 우리의 목적, 우리의 모든 활동은 참으로 신성해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쁨, 진정한 축복, 진정한 평화를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의 영적인 현존을 너무나도 확신한 나머지 의심이나 의혹이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에는 그처럼 무거운 무게가 있다. 그의 현존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분에 의해 압도될 것이다.

선교에로의 부름 中 주님께서 이 땅위에 선포하신 제일 계명은 오직 ‘인간’ 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종교니, 신앙이니, 영혼이니, 기타 세상의 어떤 무엇을 말씀하시지 않고 오로지 인간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은 마치 오고 오는 세기를 향해 하시는 말씀처럼 들린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찾아 나섰던 것처럼 우리도 사람을 찾아나서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외면했던 곳, 누추한 곳, 도외시되었던 곳, 비천한 곳 어디서든지 우리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거하면서 그들을 다시 인간답게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와 인간에 대한 사랑(humanity)를 너무나 밀접하게 하나로 결합시켜 놓으셨기 때문에 종교는 분리된 실재로 존재할 수 없다. 참다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참다운 종교가 있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거역하는 것이 곧 종교를 거역하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소망 中 예수께서 우리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부친을 장사하려는 사람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냉정한 말씀을 하셨기에 나는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지나친 숭배에 대해 꼬집어 말하려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종교개혁자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종교개혁시대와 당시의 영웅적 개혁의 주역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살아나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시대와 우리의 과업에 더 기운이 솟아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과거를 축하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우리 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루터나 구스타스 아돌프스에 대해 그만 이야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야 한다.” .... 농부는 쟁기를 끌거나 밀지 않는다. 다만 방향을 정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에서 사건들이 전개되는 방식이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속에서 매사를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 이끌리도록 똑바른 방향으로 맞추어 놓아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향할 때 밭고랑은 스스로 갈아지게 된다.

하나님의 평화 中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닥친 사소한 일들만 알게 되고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적 행복이라는 작은 구획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부에 이성과 상식이라는 불빛을 간직하고서 삶과 그 안의 문제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된다. 아무리 여건이 좋다 해도, 아무리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한다 해도,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한다 해도 우리가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평화만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통찰은 평화에 대한 열망이다. 평화란 곧 개인의 뜻과 무한한 뜻과의 결합,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의 일치를 뜻한다.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의 뜻이 그분의 무한한 뜻 안에서 평화를 발견할 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생명의 경외 中 가장 과학적인 사람이나 가장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함께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이나 지식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생명의 경외, 우리의 우주 안에서 마주치게 되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에 대한 경외, 비록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내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품성을 지니면서 우리와 무섭도록 닯았고 두려울만큼 관련된 존재들에 대한 경외인 것이다 .....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 아무리 우리와 다르다 해도 모든 산 것에 대한 자비. 나는 생명이라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해 경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자비를 거절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도덕률의 시작이요 기초다. 이런 경외를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몇 가지의 피상적 원칙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야수적이고 무지하고 무정한 채로 살아왔다 ..... 생명을 나누어 향유하고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모든 산 것들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초보적 형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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