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은 <희망의 신학>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삼부작을 포함한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 20세기 후반기의 세계 신학계를 주도한 거장인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적 자서전이다. 2차 세계대전 참전시 겪었던 극한체험을 통해 품게 된 신정론적 질문 -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에서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 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신학적 여정은 이 책의 소제목 순서가 잘 알려주듯 희망의 신학 - 정치신학 - 새로운 삼위일체적 사고 - 창조와 생명이라는 변화를 겪어가며 꾸준히 이어진다.
2. 그리고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위대한 신학적 유산들과 씨름하고, 당대의 다양한 신학사조와 대화하면서 세계가 직면한 정치 사회적 문제들과 대결하며, 모든 형태의 불의와 비진리에 저항하면서 성서적 종말론이 지시하는 미래를 향해 용기 있게 투신한다. 이렇듯 과거-현재-미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와 상호작용의 산물인 그의 신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에큐메니칼” 신학이라고 불려 마땅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과거의 위대한 ‘보수정통’ 신학자들의 오래된 정원에 핀 꽃을 꺾어다가 예쁘고 보기 좋은 꽃다발을 만드는 훈고(訓詁) 야말로 현재와 미래의 신학에 허용된 유일한 과제라고 굳게 믿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책을 통해 ‘신학함’ 에 대한 몰트만의 생각에 한번쯤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 어떨까?
3. 이 책은 상당히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몰트만의 신학에 접근하고 그의 주요 저서들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안내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대부분 신학교 교수인 한국인 제자들이 쓴 글을 통해 저자 몰트만 교수의 사적인 삶과 훌륭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원저에 없는 보너스라고 할 만하다.
본문 엿보기
전쟁 우리가 아무 소용도 없이 조준하던 고사포 설치대에 폭탄 하나가 떨어진 것은 마지막 날의 밤이었다. 엄청난 양의 파편들이 고사포 조준기를 박살냈으며, 내 옆에 있던 친구 게하르트 쇼피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그날 밤에 나는 내 생애 중에 처음 하나님을 향해 소리쳤으며, 나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나는 죽은 사람과 같았으며, 그 후에 나의 생명을 매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나의 질문은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 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였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대답을 찾고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나는 살아있으며, 내 옆의 친구들처럼 죽지 않았는가?” 나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느꼈으며 계속 살아가야 할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밤마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었다.
수용소 저녁마다 나는 성서를 읽었다. 그러다가 나는 탄원시를 읽게 되었다. 시편 39편이 나를 특히 강하게 사로잡았다. 그리고 마가복음을 맥락을 짚어 가며 읽어가던 나는 수난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는 예수의 죽음의 외침을 들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너를 완전히 이해하며, 너와 함께 하나님을 향해 외치며, 너와 똑같이 버림이 받았다고 느꼈던 한 사람이 존재한다. 나는 시련에 처한, 버림을 받았던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제요, 나와 함께 이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는 길동무요, 나의 고난을 지고 가는 친구다.....그 이후로 나는 고난 속의 형제요, 자유의 땅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인 예수와의 이러한 사귐을 중단한 적이 없다. 나는 확신한다. 1945년 그 당시에,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포로로서 영혼의 수렁에 빠져 있던 나를 예수는 찾아주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왔다’.
교회일치 운동 ; 신학과 직제 다른 교파들과 제3 세계로부터 온 신학자들과 함께했던 에큐매니칼 운동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나의 신학적 지평은 상당히 확장되었다. 독일의 신학이 주로 매우 길고 풍부한 자신의 전통과 씨름하고, 세미나에서는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루터, 칸트, 슐라이어마허, 바르트와 불트만과 같은 신학자들만을 다루는 반면에 나의 신학은 점점 더 세계적인 신학으로 발전되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교회 내에서만, 나 자신의 땅 위에서만 신학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신학하기를 시작했다. “나의 뿌리는 개혁교회이지만, 나의 미래는 하나의 교회다”
희망의 신학 신학의 그리스도론적 중심은 종말론적 지평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종말론적 지평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상 안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미래의 생명에 대한 묵상은 존재할 수 없다. 거꾸로, 만약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그 힘을 잃어버린다. 대안적 미래를 향한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와 갈등하게 하며, 현재에 집착하는 사람들과 충돌하게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지평 안에서 역사 속의 삶은 하나의 위임, 곧 선교가 된다.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가능성과 우리가 실현해야 할 목표를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미래가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약속은 이러한 미래를 최대한 선취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선교를 낳는다. 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에 저항하는 역사적인 상태가 존재한다. 이러한 상태를 변혁하기 위해 우리는 이에 저항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고대 교회의 신학은 하나님은 고난을 받을 수 없거나 (무감정의 공리), 고난에 종속된다는 양자택일만을 알 뿐이다. 하지만 고난의 다른 형태도 있다. 그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타자의 영향을 받기 위해, 그리고 타자의 운명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개방하는 사랑의 능동적 고난이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고난을 받으실 수 없다면 하나님은 사랑할 능력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고난을 받으시는 것은 존재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적이고 사랑하는 본질의 넘침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고통을 받으실 수 있고, 고통을 받기를 원하시며, 사랑하는 그분의 세계의 모순 때문에 고통을 받으신다.....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버림받고 절규하면서 죽었다면,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이에 상응하는 버림받음의 깊은 경험을 해야 한다.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 고난을 받은 곳에서 다른 위격들도 함께 고난을 받으신다,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령이 세상 속으로 파송됨으로서 시작되며, 구원을 받은 피조물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림으로서 끝난다. 그리스도의 통치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이며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핵심은 예수의 우정이다. 그리고 예수의 우정은 다른 사람들과의 열린 우정을 가져오며 더 깊은 우정을 나누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와 사귐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은 한 주인의 종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의 형제 혹은 자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예수의 친구이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이 선포되고 세례를 받고 성찬이 집행되는 곳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이것은 ‘드러난 교회’ 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 굶주린 자들, 병자들과 옥에 갇힌 자들이 있는 곳에도 계신다. 이것은 ‘숨어 있는 교회’ 이다. 드러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파송하신다. 숨어 있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기다리신다.
새로운 삼위일체적 사고 ‘삼위일체적 사고’에서는 실체와 관계는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새로운 ‘생태학적 이해’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자신의 시간을 갖고, 모든 활동은 자신의 계기를 갖고 있으며, 모든 생물은 다른 생물 안에서 자신의 생활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끝으로 ‘과정적 이해’에 따르면 개별적 사물들은 오직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시간적 계기 속에서만 적합하게 파악될 수 있다. 고정될 수 있는 상황이나 사태는 없으며, 오직 유동적인 이행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한 부분이며, 세계의 과정 안에 놓여 있다. 이 사실을 더 분명히 깨달았을 때 나는 예전에 책에서 취했던 ‘긍정이 아니면 부정’이라는 변증법을 버렸으며, 관계와 친교와 변화 속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사고를 나는 일반적으로 ‘삼위일체적론적 사고’ 라고 불렀으며, 특별히 ‘순환적 사고’ 라고 불렀다. 여기서 순환 (perichoresis) 이란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를 뜻하며, 따라서 ‘순환적 신학’ 은 영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일치, 믿는 자들과 하나님과의 친교, 사랑하는 자들의 상호 간의 친교를 포함한다.
새로운 생명신학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율동의 리듬, 눈빛, 포옹, 이 오색찬란한 창조 세계의 온갖 느낌, 향기, 소리를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에, 나는 모든 것을 포옹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사랑스러운 창조 세계 안에서 내 모든 감각으로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오래도록 나는 당신을 나의 내면에서 찾았습니다. 나는 내 영혼의 껍질 안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갑옷으로 무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 밖에 계셨으며,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사랑의 넓은 공간으로 나오게 하사,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드디어 나는 나로부터 벗어나 내 감각 안에서 내 영혼을 찾았으며,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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