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cam, 1280~1349)과 그 제자들로 대표되는 중세 후기의 유명론은 개별 존재의 배후에 보편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런 주장이 수용되면 이성을 사용하여 총체적인 사상이나 개념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이는 모든 신적 교리가 권위에 의존하는 믿음의 문제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는 실재론에 근거한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처럼 합리적 논거에 의해 증명될 수 없고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뿐 아니라 전능하시다는 것도 확인해준다.
2.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에는 한계가 없으며 인간의 이성이나 선악구분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먼저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합리적인지 결정하시며, 그 후에 하나님은 비로소 “제한적 능력"에 의하여 이러한 범주에 따라 행동하신다. 따라서 어떠한 교리가 인간의 관점에서 합리적일 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능력을 염두에 둘 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이 대속을 성취하기 위한 유일하거나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방법을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교리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계시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3. 인간 가운데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육신에 적당한 요소가 있다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며, 피조물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임재는 항상 기적이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신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전지성은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조차 불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이성으로 교리의 진리나 오류를 증명할 수 없으며, 오직 무오한 권위의 토대 위에서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교황 및 교회의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오직 성경만은 무오하며, 우리는 이성이 의심으로 이끌더라도 '의존하는(trust) 신앙'을 가지고 성경의 약속을 신뢰해야 한다.
4. 이러한 유명론은 스콜라 신학으로 대표되는 중세 서방 기독교의 신학적 원리들을 부식시키는 교리였으며, 많은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유명론 전통에 서 있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유명론이 종교개혁으로 가는 고속도로인 것만은 아니었다. "근대의 길"(via moderna)이라 불리는 유명론 학파는 하나님이 공익을 위해 무한한 자비로 인간적 덕목에 가치를 부여하시고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도록"(facere quod in se est) 허락하시는 계약을 맺는다고 주장함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관주의를 피해갔다. 또한 유명론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성의 영역에서 제거한 결과 출현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경건의 형태인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역시 철저한 인성의 타락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과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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